고달픈 민생…통일신라 뒤흔든 '혁명의 불씨'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 '김헌창의 난' 해부

(사진=KBS 제공)
통일 이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태평성대를 누리던 신라. 하지만 100여 년이 흐른 822년, 무려 절반 가까운 세력이 신라에 반기를 든다. 반란을 이끈 이는 김헌창이었다. 그는 '장안'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신라 사회를 뿌리째 뒤흔든다.

10일(일) 밤 10시 30분 KBS 1TV에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신라판 '금수저'인 진골 귀족 김헌창이 신라에 반기를 든 이유를 파헤친다.

"822년 3월, 웅천주 도독 헌창은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함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 '삼국사기' 중

785년, 당시 왕위 계승 서열 1위는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이었다. 그럼에도 상대등이었던 김경신이 왕위에 오른다. 김주원이 갑작스러운 큰 비로 신라 왕실에 도착하지 못한 탓이었다. "폭우는 하늘의 뜻"이라는 신라 귀족들의 의견에 김주원은 왕좌를 빼앗긴 것이다.

그로부터 37년 뒤, 순순히 왕의 자리를 내어준 아버지와는 달리 김헌창은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정말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해 불만을 품었던 것일까.


경주의 한 우물에서 어린 아이의 해골이 발견됐다. 분석 결과 아이는 약 9세기 신라의 국가 제사에 '인신공양'된 것으로 밝혀졌다. 고달픈 민생을 달래기 위해 어린 생명이 희생된 것이다. 신라 하대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백성들은 당나라로 구걸을 가고 자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탐욕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3000명의 노비를 부리기도 하며 호의호식했다. 게다가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시기에 왕의 자리에 있던 제41대 헌덕왕은 '신라판 수양대군'으로 불린다. 자신의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인물인 까닭이다.

정권이 바뀌며 좌천된 김헌창은 지방관을 두루 거치며 이렇듯 모순으로 가득찬 신라의 현실을 직접 목격했을 터였다. 결국 그는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신라에 반기를 든다. 김헌창이 일으킨 난은 순식간에 절반 가까운 지방 세력의 지지를 받는다. 그는 나라 이름을 장안이라 짓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신라를 전면 부정한다.

그러나 신라군의 일사불란한 진압과 밀고자로 인해 김헌창의 군대는 크게 패하고, 그는 가까스로 웅진성에 몸을 숨긴다. 이후 열흘간 계속된 신라군의 맹공에 패배를 직감한 김헌창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신라 사회를 뒤흔든 혁명의 불씨가 한 달 만에 허무하게 꺼져버린 것이다.

김헌창의 난은 많은 세력의 호응을 얻었지만 백성들의 깊은 단결력을 끌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지방 호족을 깨우는 계기가 됐고, 이후 후삼국 시대의 서막을 여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신라 사회의 모순을 깨닫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김헌창의 불꽃같은 삶이 역사저널 그날을 통해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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