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난 2015년 한 해를 가장 알차게, 뜻깊게 보낸 배우 중 하나다. 영화 '베테랑'에서는 사건의 포문을 여는 비열한 전소장 역을 맡았고, '내부자들'에서는 부장검사로 분해 흙수저들을 울리는 명대사를 남겼다. "그러게 잘하지 그랬어. 아니면 잘 태어나든가!"
강한 인상은 심었지만 따로 이름이 없는 조연이라 분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대호'는 또 다른 기회를 여는 영화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천만덕(최민식 분)과 끊임없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포수대 대장 구경 역을 연기한다. 그가 없다면 아예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을 정도로 대척점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신스틸러'(영화나 드라마에서 연기력이나 개성으로 조연이 주목을 받는 현상) 배우로 불리지만, 정작 그는 그런 별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늘 제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만 최선을 다하는 성격 상, 누군가의 빛을 잃게 하는 뉘앙스가 불편했던 탓이다.
다음은 거친 외모와 달리 마음만은 따뜻한 배우, 정만식과의 일문일답.
▶ 대호가 CG(컴퓨터그래픽스)이기도 했고, 여러 가지 모험이 많았던 영화였다. 처음에 보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 만족한다. 만족하지 않는다고 뒤엎을 수도 없지 않나. (웃음) 보기 전부터 불안한 느낌이 심했는데 실제로 시사에서 보니까 좋더라.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역할이 커서 좀 겁을 먹으면서 봤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캐릭터 사이의 관계가 잘 전달이 됐고, 후에 대호가 나타나면서 탄력이 붙지 않았나 싶다.
▶ 연기를 할 때는 호랑이가 없었다. 그런데 대호를 향해 분노도 해야 했고, 여러 가지 감정을 표현했다.
- 차라리 대사를 하면서 소리 지르고 싸우는 것이 에너지가 덜 소비된다. 없는 물체를 거리, 크기, 리액션까지 생각하면서 연기하는 건 머리가 더 아프다. 외국 배우들은 왜 그렇게 잘 하는지 모르겠다. 쉽지 않았다.
▶ 불안했던 부분은 역시 CG인가?
-CG와 드라마의 조합이 조금만 틀어져도 그냥 그림 영화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한국 문화 안에 있는 토속 신앙의 모습들이 영화에 있는데 그런 것들이 잘 보이지 않거나 훼손될 수도 있는 거다. 이 때문에 우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히려 호랑이 CG가 눈물 난다고 하더라.
▶ 영화 속의 구포수는 복수에 불타는 인물이다. 실제 본인과 닮은 지점이 있다면?
- 아마 구포수도 그걸 조금만 내려 놓았으면 산과 함께 더불어 살았을 것이다. 저도 처음에는 꿈이 원대했다. 제 큰 목적은 무대나 영화를 통해 연기를 계속 하는 것이고, 최종 목표는 나중에 제가 세상에 없을 때 비석이나 납골당을 보고 누군가 저를 기억해 준다면 성공한 것이라고 본다.
▶ 그렇다면 '대호'에 나온 캐릭터 중 누구와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하는지?
- 천만덕을 지향하는데 지금 삶은 칠구 같다. 그냥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사는 사람인 거다. 열정을 다 내던진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오늘 하루 쓸 수 있는 에너지는 다 쓰려고 하는 사람. 그걸 다 써야 가장 좋은 결과물이 얻어지는 것 같고, 그렇게 해야 집에 가면 아내가 만들어 주는 밥이 맛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짓밟고, 발목을 잡고 그런 건 제 스타일이 아니다.
- 밥이 너무 맛있어서 다들 살이 쪘다. 끼니마다 고기가 빠진 적이 없다. 추울 때 삼계탕 먹으면 정말 맛있다. 전 술을 그렇게 잘 먹는 편이 아니다. 언제 한 번 리조트에서 묵은 적이 있었는데 포수대 배우들이 리조트 편의점 양주를 몽땅 털어 마셨다. 막걸리가 없어서 양주 여섯 병을 다 사갖고 올라왔다더라. (웃음) 다음 날 해장으로 산책하고 그랬다.
▶ 일제시대 호랑이 사냥을 소재로 한 영화다. '대호'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되새길 수 있는 것 같다. 누가 야망과 욕망 없이 지금 시대를 살아가겠느냐. 누구나 그런 것들이 충족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조금만 느리게 멈춰서 생각을 해보면 분명 감사하고 만족할 것들이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앞만 보고 달려간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지금도 나쁘지 않고,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것 같다.
▶ 대표적인 '신스틸러' 배우들 중에 한 명인데. 이번에도 그런 자신의 역량이 충분히 발휘됐다고 생각하나?
- 그 말을 안 좋아한다. '스킬'이 없는데 무슨 '스틸'이냐. (웃음) 그냥 그 상황에 잘 적응하려고 하는 것 뿐이다. 최민식 선배가 '30년 가까이 사냥질한 얼굴, 하나에 집중해서 살아갈 수 있는 얼굴은 정만식이 어떠냐'고 해서 그렇게 합류하게 됐다. 거기서 내가 무슨 '스킬'을 쓰면 그건 나쁜 짓이다. 다른 배우들은 어쩌고, 극은 어떻게 흘러가겠냐.
▶ 연기를 할 때 철저하게 계산을 하고 하는 편인가?
- 구체적으로 어떤 설정이나 톤을 계산해 본 적이 없다. 저는 기본적으로 그 때의 그 때의 상황에 충실한 타입이다. 그 상황 속에 흐르고 있는 정서에만 집중하지 연기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특히 굉장히 쉽고 평면적인 의도가 깔린 캐릭터에 대해서 무엇을 보여주려 하면 그 때부터 억지스럽고 비릿해진다.
-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잊혀지지 않는 짠한 아픔을 갖고 연민을 주려면 그냥 대사를 외우기만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살아 움직여야만 된다는 생각을 해서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러다 보니 폐쇄적으로 변해서 아내와도 조금 그랬다. 최선을 찾기 위해 생각을 하다 보니 말수가 줄어서. 최근에는 다시 늘어나고 있다.
▶ 촬영할 때는 캐릭터에 아예 빠져 지내는 타입인가 보다.
- 최대한 그러려고 애를 쓴다. 사실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배우 정만식을 보러 오겠냐. 이번에 어떤 역할을 하나 보러 오는 거지. 결국 뭘 해도 그 역할로 보여지는 게 낫다. 작은 변화들을 느끼려면 역할에 최대한 들어가 보려고 하는 것이지. 배우가 가진 가장 성실한 태도가 자신의 배역을 만나려고 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만나야 손을 잡든, 포옹하든, 눈을 마주치든 할 것 아닌가. 보이지 않는 무형의 어떤 것을 표현하려면 만나야 한다.
▶ 그런 마음가짐 때문인지 최근 나왔던 영화 '베테랑', '내부자들' 등에서도 짧지만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다. 개봉한 영화들이 다 잘되기도 했고.
- '베테랑' 촬영할 때는 발가락도 깨지고, 뼈가 깨지기도 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기분 좋다. 경제적으로 먹고 살만하기도 하고. (웃음) 함께 했던 감독님들이 다 잘되기를 바랐던 분들이다. 그래서 정말 다행이고, 당사자들 못지 않게 기뻤다. 함께해서 거기까지 가는데 노라도 한번 저어준 것 같아 보답이라도 하듯이 마음이 편해진 것 같다.
▶ 그런데 대부분 절대 악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선한 역할은 아니었다. 그런 역할들이 본인과 잘 맞나?
- 악역과 잘 맞지 않는 성격이라 마음이 아프다. (웃음) 그런데 할 때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고 재밌다. 사실 저는 현대인의 삶 속에 어떤 인간 군상을 연기했을 뿐이지 악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늘 최대한 보편타당성이 있는 인물로 보이도록 노력하고 있다. 모두가 수긍할 수는 없지만 '저런 사람 나도 현실에서 봤다'는 생각을 하도록. 그렇게 접근하려고 애쓴다.
▶ 결혼하고 한창 신혼을 즐기고 있겠다. 가정을 꾸리기 전과 후에 일에서 달라진 지점이 있나?
- 아무래도 돌아가면 쉴 공간이 있다보니까 쉼을 위해 더 달릴 수 있는 것 같다. 아내가 응원도 해주고, 영화를 선택할 때 고민되는 것들도 함께 공유한다. 일단 배우보다는 인간 정만식의 삶이 달라졌다. 아내의 종교에 축복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너무 안정감이 들어서,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불안할 정도로 행복하다. 이 행복이 갑자기 없어지면 어떡하나. 그렇게 한 번 아내에게 물어봤는데 그냥 식사하라고 하더라. (웃음) 2세는 아직 모르겠다. 하늘의 뜻인 것 같다.
▶ '대호'에서는 천만덕이 추구하는 반대 지점에 서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축으로 활약했다. 다른 역할들과는 남다른 느낌이 있었나.
- '대호'를 하면서 많이 느낀 것이 좀 안다고 대충하면 덫에 걸린다는 거다. 이번에 그런 위험을 감지했으니 명확한 연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늘 집중도 있는 작업을 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끔 연기를 해야겠다고. 어떤 연기든 스스로 몸을 던질 의향이 있어야 한다. 흐름대로 하려면 강에 빠지는 게 제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