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7일(일) 밤 9시 40분 KBS 1TV에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180도 다른 원효대사에 관한 진실들이 밝혀진다.
원효는 밤중에 달게 마신 물이 해골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진리는 오직 마음속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고승 533명의 전기를 수록한 당나라 책 '송고승전'의 원효에 관한 기록에는 해골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해골물은 원효의 깨달음과는 무관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원효하면 해골물을 떠올리게 된 것일까. 그날 무덤에서 원효에게 벌어진 일들이, 그의 행적을 담은 7미터짜리 거대한 두루마리 그림을 통해 샅샅이 파헤쳐진다.
'그의 발언은 미친 듯이 난폭하고 예의에 어긋났으며 행동은 상식의 선을 넘었다' - '송고승전' 중에서
유학을 그만두고 신라로 돌아온 원효의 행적에서 믿을 수 없는 모습들이 포착된다. 조롱박을 들고 춤을 추며 저잣거리를 활보하는가 하면, 여염집에서 유숙을 하고 주막이나 기생집에까지 출입한다. 도저히 승려의 행동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원효대사의 파격적 행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들에게는 원효가 일약 슈퍼스타로 떠오른다. 차별과 구별이 없는 '무애' 사상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며, 삼국 간의 계속된 전쟁으로 피폐해진 7세기 신라 백성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된 것이다. 불교 이론가에서 실천가로 변모한 원효, 그를 변화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원효의 파계 행보에 정점을 찍는 사건이 발생한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결혼해 설총을 낳은 것이다. 당시 신라 사회는 골품제라는 강력한 신분제가 존재했다. 6두품 출신의 승려 원효와 왕족 신분인 공주의 결혼은 절대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의하면 왕이 먼저 뛰어난 인재인 원효를 알아보고 직접 왕궁으로 들였다고 전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요석공주가 무열왕 김춘추의 딸이라는 학설이 제기되며 원효를 '로열패밀리'로 보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과연 원효의 결혼은 왕실의 계획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