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경찰, 한국 경찰 자문에 '청부살해' 가능성 수사

현지 경찰 차장 "한국 경찰 제공 정보 수사에 큰 도움"

필리핀 한인 남성 피살 현장에 급파된 한국 경찰 특별수사팀이 현장 감식을 벌이고 있다
지난 20일 새벽 필리핀 중부 바탕가스 주 말바르 시에서 한국인 사업가 조모(57)씨가 피살된 것과 관련해 필리핀 경찰이 청부 살해쪽에 무게를 두고 용의자를 쫒고 있다.

자칫 단순 강도로 장기 미제 사건이 될 뻔했던 수사가 한국에서 급파된 경찰관들의 범죄 현장 재구성과 분석으로 속도를 내고 있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현장감식과 폐쇄회로(CC)TV 분석관 등 경찰관 3명과 국과수 전문가 1명을 사건 다음날 필리핀 현장에 급파했다.

필리핀 경찰과 현장 수사를 함께 진행한 한국 경찰관들은 용의 차량과 범행에 사용된 총기 출처 등을 특정하는 성과를 내고 4박 6일만인 25일 새벽 귀국했다.

◇ 필리핀 교민살해, 전처 청부살인? 사업상 원한관계?

숨진 조씨의 현지인 전처를 용의 선상에 올려놓은 필리핀 경찰은 사업상 다른 원한 관계로 청부살인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또 단순 강도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하지만 필리핀 경찰은 조씨와 7년 전에 헤어져 이혼소송 중인 현지인 부인을 주목하고 있다.

해당 여성이 조씨가 피살되기 직전 조씨에게 재산 분할을 요구하며 청부살해 협박을 했다는 주변인 진술이 나왔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 여성이 실제 살인을 사주했다면 누구에게 했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 통화기록과 거래 내역을 조사하고 있다.

필리핀 경찰은 한국에서 파견된 특별 수사팀으로부터 용의 차량이 찍힌 CCTV 분석 영상을 넘겨받아 용의자들의 도주로를 추적하고 있다.

조씨는 앞서 20일 새벽 1시30분쯤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조씨가 4인조 괴한에게 총격을 받은 곳은 당초 알려진 자택이 아닌 현지인이 싼 값에 살 수 있는 이른바 '보딩하우스'라는 간이 숙소였다.

조씨는 자신이 건설하는 기숙사 공사장 인근 간이 숙소에서 숙식을 하며 공사 현장을 지휘한 것으로 전해졌다.

범행 당시 4인조 괴한은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고 2명은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1명은 소총을 들고 있었다.

이 가운데 1명이 침대로 올라와 조씨의 입을 막고 제압한 후, 집에 있는 끈으로 가정부와 조씨의 손발을 묶고 돈을 요구해 1000 페소를 챙겼다.

이후 괴한들은 집을 뒤져 전기밥솥 등을 챙겨 집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 1명이 다시 들어와 권총으로 조씨의 팔과 가슴 등에 6발을 발사했다.

현장에서 한인 남성 피살 때 사용된 45구경 권총 탄피. 필리핀 감식팀이 찾아내지 못한 탄피를 한국 경찰관들이 발사각도 등을 분석해 추가로 수거했다.
◇ 필리핀 경찰, 단순 강도 사건으로 초동수사

사건발생 이틀만에 한국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필리핀 경찰은 폴리스라인 등 현장보존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또 조씨가 총격으로 숨졌지만 발사된 총탄과 탄피 등도 제대로 수거하지 않고 초동수사를 마친 상태였다.

필리핀에 급파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총기분석 전문가 김동환 박사는 현장 건물 구조와 목격자 진술을 면밀히 분석해 총기 발사 위치와 잔류 화약 검사를 진행했다.

이를 토대로 탄피 위치를 추정해 필리핀 경찰이 찾아내지 못한 45구경 권총 탄피 2개와 격발되지 않은 22구경 소총 실탄 1개를 추가로 수거했다.

또 범행에 사용된 총기가 정부에 등록되지 않은 불법제작 총기인 것도 파악하고 용의자를 쫒고 있는 필리핀 경찰에 통보했다.


범행 현장감식 분석관으로 파견된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과 소속 김진수 경위는 현장을 재감식해 추가로 발견한 탄피에서 장갑흔 등을 확인했다.

필리핀에는 CCTV가 일부 설치돼 있지만 화질이 낮고 보존 상태도 엉망이다.

CCTV분석 전문가로 파견된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소속 김희정 행정관은 새벽 시간대에 찍힌 저화질 CCTV 화면을 영상보정해 사건 현장 인근에서 범죄에 쓰인 용의 차량을 찾아냈다.

또 화면에 찍힌 차량 사진을 전세계 SUV 차량 데이터베이스에 돌려 라디에이터 그릴, 유리창 곡선, 범퍼 모양 등을 비교 분석해 용의 차종을 최종 특정했다.

이 때부터 현지에 급파된 한국 경찰관들은 바빠졌다.

인근 고속도로 톨게이트 7곳에 설치된 CCTV에서 범행시간 전후 42시간 분량의 영상을 확보한 파견팀 전원은 모두 밤을 새며 분석에 매달렸다.

결국 사건 현장에서 약 4km, 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고속도로 요금소를 통과하는 용의 차량 사진을 추가로 확보했다.

용의 차량 번호판 분석은 물론 용의자들의 동선 추적도 가능해 수사 주체인 필리핀 경찰 입장에서는 결정적 단서를 확보한 셈이다.

◇ 수사속도와 기법에 혀 내두른 필리핀 경찰

CCTV 분석과 현장 감식 능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필리핀 경찰은 이때부터 한국 경찰의 수사 능력에 감탄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성과물이 나오자 단순 강도로 추정했던 필리핀 경찰도 덩달아 바빠졌다.

범죄분석 전문가로 파견된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과 소속 이상경 경사는 사건 당시 목격자와 피해자 유족을 심층 면담했다.

또 괴한들의 범죄 행동을 재구성하고 범행 전후 보인 행동과 위치, 범행 시간을 면밀히 분석했다.

이를 통해 괴한 4명 중 2명이 숙소에 들어가 물건 등을 훔쳐 나온 뒤, 다시 1명이 되돌아가 조씨를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결국 한국에서 파견된 특별 수사팀은 필리핀 경찰에 단순 강도살인 가능성뿐 아니라 계획적인 청부 살인일 가능성도 염두하고 수사할 수 있도록 자문했다.

필리핀 코리안데스크에 파견된 서승환 경감 역시 한국 경찰관들이 현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필리핀 경찰측과 사전 조율하고 양측간 정보공유가 원활할 수 있도록 바쁘게 뛰어다녔다.

수사본부장인 가파스 필리핀 바탕가스 지방경찰청 차장은 "한국 경찰이 우리를 돕기 위해 온 것이 매우 기쁘다"며 "한국 경찰이 제공하는 어떤 정보라도 수사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 교민회장 김근한씨는 "지난 11월 강신명 경찰청장이 필리핀을 방문해 한인 피살 시 수사팀 파견을 약속했는데 실제로 파견해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경찰은 필리핀 경찰이 추가 공조수사를 요청하면 언제든 응한다는 방침이다.

경찰 관계자는 "필리핀 내 교민 대상 강력범죄가 발생하면 필리핀 정부 요청 시 언제든 한국 경찰관을 파견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반드시 검거된다는 인식을 심어 범죄를 줄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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