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유병재·최민수·김미화와 함께 기록한 '세월호 1주기' ② 승자 없는 서울시향 사태, 남은 건 언론의 마녀사냥 ③ 네 번 터진 '천만영화'…그 이면의 '양극화' ④ "빼앗긴 '볼 권리' 되찾자"…영화계·국회는 '불구경' ⑤ 가요계 덮친 '음원 사재기' 의혹, 그 뒷이야기 ⑥ 왜 '쿡방' 보면서 배달앱을 누를까 ⑦ 여성은 왜 조롱 당할까…'혐오'로 얼룩진 방송가 ⑧ "포르노적 '여혐' 방송…수치심 모르는 수준" (끝) |
▶ 최근 방송에서 접한 여성 비하·혐오 사례를 꼽는다면.
= 방송을 자주 보지 않는다. 방송을 보고 있으면 즐겁다기 보다는 짜증이 나거나 괴롭다. 그만큼 여성에 대한 비하나 여성 이미지에 대한 착취뿐만 아니라 방송의 전반적인 수준이 '괴로운' 수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보다가 만 드라마 중에는 '육룡이 나르샤'가 있다. 초반부 여성 주인공이 강간 당하는 상황을 설정하면서 이런저런 비판을 들었던 작품이다. 여성 주인공의 강간 장면이 꼭 필요했느냐는 시청자들의 문제제기에 제작진은 "남성 주인공의 각성을 위해 필요한 설정이었다"고 대답했다.
이런 경우는 대중문화에서 매우 흔하다. 남성 주인공의 어떤 변화를 위해서, 혹은 남성 중심 서사를 끌고가기 위해서, 여성들이 그저 액세서리나 '사라지는 매개'로 활용되는 것이다. 사실 방송 자체가 여전히 견고한 성별 이분법과 성역할, 성고정관념 등에 기대고 있어서 특별히 무엇이 여성비하 사례다라고 굳이 찝어낼 수 없을 정도다.
▶ 지난 16일 가수 아이유, 윤아의 신체적 특징을 부각시킨 조작 사진을 내보내 성희롱 논란을 부른 SBS '한밤의 TV연예' 제작진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는데, 어떻게 다가왔나.
= 대중문화에서 드러나는 지배적인 사고방식을 문제삼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작동을 비판할 때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이 "농담은 농담일 뿐"이라는 반응이다. 그러나 사실 한 사회에서 무엇이 웃음을 유발하는가, 무엇이 농담이 되는가는 매우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문제다. 예컨대 '뚱뚱한 사람'에 대한 농담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웃음은 '뚱뚱한 사람'을 비하하는 문화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그저 농담일 뿐'인 농담은 없는 셈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웃음은 '풍자'보다는 '폭력'으로부터 더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여성, 외국인, 장애인, '보통'이지 않은 몸 등이 웃음거리가 된다. 소수자와 타자에 대한 비하는 생각 없이 바로 공유되고 소비된다. 인터넷에서 '떡밥'이 되는 재미의 표현들뿐만 아니라 대중매체에서 '흥미'를 유발하려는 기획들 역시 이렇게 생각이 필요하지 않은, 쉬운 포르노가 돼 버린 재미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선비'나 '설명충' '진지충'이 돼 버린다. "몰랐다, 재미있으라고 그랬다"는 말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재미있으면 다인가?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그게 다인 것도 같다. 개인적으로는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해도 되는 비하'이거나 '모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방송의 수준은 사회의 수준을 반영하기도 하며, 동시에 사회의 수준을 끌어내리기도 한다. 외부에서는 비판이, 내부에서는 자성이 필요하다.
▶ 유독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여성에 대한 비하, 혐오 분위기가 강하다.
= 사실 방송에서 드러나는 남녀 사이의 성별위계는 뉴스를 비롯한 시사프로그램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남성의 말에 더 권위가 부여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비하와 혐오의 경우 코미디에서 더 많이 나타나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개그'라는 것이 대중의 감수성을 더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그와 소통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시대의 혐오가 웃음이라는 형식을 얻었다면, 웃음은 혐오라는 내용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 여성이 남성의 복근을 빨래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성희롱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질문은 "그렇다면 남자들은 왜 가만히 있는가"여야 한다. 성희롱은 근본적으로 권력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똑같은 말을 '희롱'으로 느끼느냐 아니냐 역시 권력의 문제다.
그렇다면 왜 남성들은 여성들의 '희롱'을 희롱으로 느끼지 않을까? 혹은 문제제기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까? (이 질문에서 희롱한 특정 여성이 사회적으로 권력을 갖고 있어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특정 남성의 경우는 제외한다.) 남성들이 여성들의 희롱에 위협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그 희롱이 현실적·물리적인 위해로 전환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혹은 "어디 남자가 쪼잔하게"와 같은 억압적 시선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남성은 힘이 있고 강인하다'는 식의 사고방식 때문이므로 여성과 함께 사회의 고정관념에 맞서 싸울 일이다.
▶ 여성학의 관점에서 여성 비하·혐오의 근간에는 무엇이 깔려 있다고 보는지.
= 기본적으로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가부장제 사회의 성차별이 놓여 있을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주목하고 그 차이를 차별로 바꾸어 여성을 단속하는 문화가 여성에 대한 비하와 혐오의 근간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여성에 대한 비하·혐오의 이유와 성격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세 유럽에서는 여성의 재생산성이 혐오의 대상이 됐다. 그래서 생리 기간 중 여성은 예배를 보러 들어갈 수 없다든지의 금기가 생겨난다.
이슬람에서는 여성의 성·섹슈얼리티가 위험한 것, 혐오스러운 것으로 치부돼 그것을 단속하고자 '히잡'이나 '부르카' 같은 것을 쓰도록 한다. 말하자면 시대상이나 문화적 차이에 따라서 혐오가 발생하는 이유나 원인이 또 달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차이가 아주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에서는 여전히 생리 기간 중 여성은 코란에 손을 못 대게 돼 있다고 한다.
▶ 한국 사회에서 1990년대 후반 이후 더욱 가시화 되기 시작한, 지금과 같은 여성 혐오의 원인은 무엇일까.
= 아무래도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경제적, 사회적 불안이 그 원인이 아닐까 한다. 아무리 '노오오력'해도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헬조선'이라는 삶의 조건이 여성혐오를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 혐오의 중요한 하나의 원인이다. 나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원인을 구조에서 찾기보다는 "나의 밥그릇을 빼앗아" 갈 수도 있는, 혹은 "내가 보기에 사회가 주는 혜택들에 무임승차" 하는 타인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더불어서 타인의 잘못이나 실수, 나와의 차이 등을 조금도 참지 못하고 비난과 우스갯거리로 삼아 버리는 우리 시대의 한없는 가벼움, 한없는 성급함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 약자들은 훨씬 더 쉽게 조롱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웃음거리가 된다. 그런 조롱을 인터넷에 올림으로써 주목을 받고, 그런 주목이 삶을 지탱하는 즐거움이 된다. 한편으로는 이런 점증하는 여성 혐오와 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여성들의 등장을 사회 변화의 한 계기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조금씩 높아지고 전통적인 가부장제가 흔들리면서 그에 대한 불안이 여성혐오의 형태로 드러난다. 여성들도 이제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고, 이런 흐름이 어떤 사회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해야 할 것 같다.
▶ 현재 한국 사회의 여성 비하·혐오는 어떠한 수준이라고 진단하나.
= 수치심을 모르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라는 교양이나 상식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무너진 상태인 것 같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인가? 그것은 잘 모르겠다. 대중문화나 대중매체 등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았을 때는,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한국에서 여성혐오가 좀 더 과격하게 표현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 철학자 존 그레이는 "인류에게 지식은 축적되지만 지혜는 축적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간이 전쟁을 비롯해 다양한 폭력과 착취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은 이 말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평등하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상식처럼 보이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서 그것이 그렇게 '자명'한 일은 아니다.
예컨대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라고 말하면서도 남녀의 임금 차이는 능력의 차이로 쉽게 합리화된다. 과연 능력에 차이가 있는지, 혹은 그 '능력'이라는 것이 어떤 기준에서 평가돼 규정되는지, 그 기준은 합당한지 등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능력'이라는 지배적인 언어 안에서 '인간의 평등'이라는 관념은 쉽게 폐기된다. 만약 인간의 평등이 자명한 것이라면 이처럼 끊임없이 주장하고 설득하고 논증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을 비롯한 소수자 운동은 끊임없이 인간의 평등과 존엄의 자명성을 만들고 또 설득해 온 과정이다.
▶ 한국 사회에서 성평등에 관한 사회적 합의는 왜 이리 쉽게 무너졌을까.
= 나는 건강한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한번 형성되면 쉽게 유지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깨지고 퇴행할 수 있다. 사실 그것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안에서 고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정치적 운동들은 상황에 맞게, 늘 새롭게 운동을 변화시켜가야 한다.
특히 우리들은 현실적으로 삶에 여유가 없을 때, 더 편하고 익숙하며 명쾌해 보이는 사고방식에 기대고자 한다. 사회적 위기의 순간에 파시즘이 도래하기 쉬운 이유가 이것이다. 나는 지금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현실이 꼭 페미니즘의 실패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페미니즘이 충분하지 못했거나 방향 설정을 잘못해 왔을 수도 있다. 이건 페미니즘의 완벽함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운동들은 언제나 현실로부터 배태되기 때문에 한계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 역시 가끔 "왜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가?"라고 질문할 때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는 어느 부분에서는 달라지고 어느 부분에서는 좀 더 나아졌을 것이라 믿는다. 그 나아진 부분에서 지금과 같은 온라인 페미니즘이나 대중 페미니즘 운동이 촉발된 것 아닐까.
▶ 공익성·파급력 측면에서 선정성을 좆는 현재의 방송 등 미디어 환경을 어떻게 보는지.
= 우리는 미디어 과잉의 시대를 산다. 방송이 가지는 힘은 대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다른 미디어들과 경쟁해야 살아남는 시대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미디어는 점점 더 자극적이 되고, 말초적이 되며, 그렇게 욕망에 직접적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에서 포르노적이 돼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맥락에 대한 이해나 사유가 필요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만든다.
선정성 경쟁이 붙기 시작하면 제어가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영향력 때문에 한편으로는 선정성이 '자연화' 돼 버린다. 타인의 이미지를 착취하고 비하하고 혐오하는 문화가 일상으로 스며들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돼 버린다는 의미다.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왜 여성 비하·혐오를 경계해야 하나.
= 여성에 대한 혐오와 비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문화와 인식론을 만들어 낸다. 여성 혐오는 그저 인터넷을 달구는 유희나 낄낄거리며 웃고 넘길 농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차별을 만들어 내고 물리적 폭력을 양산한다. 일종의 차별선동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헬조선을 살아가면서 정신승리하고 위안을 받기 위해 누군가를 혐오하는 행위는 서로의 서로에 대한 증오와 혐오만을 낳고, 실제로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을 볼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면 사회는 점점 더 악화될 뿐이다.
▶ 여성 혐오에 저항하고 대응하는 지금 한국 사회 여성운동의 특징을 꼽는다면.
= 다양한 운동과 흐름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다'라고 특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올해 특히 두드러진 흐름을 하나만 꼽자면 그것은 '대중의 움직임'인 것 같다. 올 한 해 페미니즘이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그것은 대중적인 관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 많은 대중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움직이고 말을 보태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한국 사회에서 위험수위에 달한 여성 혐오를 누그러뜨리고, 결국에는 퇴출시킬 수 있는 복안을 치열하게 고민해 왔을 텐데.
= 끊임없이 비판적인 시각을 벼리고 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대중적으로 토론하면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회적 합의는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 수준의 변화와 연결돼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싸움일 것이다. 이런 인식의 변화가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예컨대 '맥심 표지 사건' 같은 경우다. 이는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대중문화계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고 어떤 것을 고려해야 하는지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갑자기는 아니더라도 서서히 변화가 오지 않겠나. 혐오 표현을 '차별선동행위'로 규정하고, 법적으로 규제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자를 위해 '표현의 자유'가 희생되는 경우가 여전히 많고, 그 정도가 심각한 한국에서 이런 논의를 이어가려면 더 많은 준비와 토론이 필요할 것 같다. 결국 이 역시 '사회적 합의'의 문제일 것 같다. 희망을 보지 않는다면 버티기 힘든 시절 아닌가.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자신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합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 안에서 희망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