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흐뭇한 소식을 전하며 세밑을 따뜻하게 만드는 선수들도 있습니다. 바쁜 시즌 중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가 마침내 짬을 내 나선 선행들입니다. 이웃을 위해 김치를 담그고 하고, 연탄을 배달하는가 하면 난치병 환아들을 방문해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11월 말의 일이지만 대한민국 4번 타자 이대호는 벌써 10년째 시즌 뒤 사랑의 연탄을 배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깥 추위 못지 않게 마음을 시리게 하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립니다. 올해 한국시리즈 패권에 영향을 미쳤던 해외 도박 파문이 한일 무대를 평정한 최고 소방수 오승환에게까지 번졌습니다. 이미 이번 스캔들로 은퇴 위기에 몰린 임창용에 이어 오승환 역시 검찰 소환 조사에서 혐의를 일부 시인했습니다.
여기에 SNS를 통해 인기 치어리더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야구 선수가 결국 재판에 넘겨진다는 우울한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해당 선수는 공식 사과를 했지만 피해자인 치어리더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소장을 제출해 결국 기소된 겁니다. 이 선수 역시 내년 활약을 장담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이런 일련의 소식들을 접하면서 야구 선수의 책임과 역할, 의무가 무엇일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이제는 선수가 단순히 야구만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닌 시대가 온 것은 아닐까, 바야흐로 야구 선수도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의무를 져야 하는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이른바 야구 선수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연예인급 유명세, 대기업 임원 뺨치는 몸값
프로야구 선수들의 위상은 최근 크게 높아졌습니다. 국민 스포츠로 자리잡은 야구 인기의 상승과 함께 선수들의 유명세도 달라졌습니다. 선구자 박찬호를 비롯해 김병현, 최희섭, 서재응 등 메이저리거들이 득세했던 1990년대 중후반과 2000년대와 달리 요즘은 국내 선수들도 해외파 못지 않은 인지도를 자랑합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베이징올림픽 등 국제무대에서 강호들을 누르거나 대등한 경기를 펼치면서 KBO 리그 선수들도 충분히 세계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인식이 확실하게 자리잡았습니다. 여기에 류현진(LA 다저스)과 강정호(피츠버그) 등 KBO 리그 출신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하고, 박병호(미네소타)를 비롯해 볼티모어 입단이 확정적인 김현수 등 미국 진출이 이어진 것도 리그의 가치를 높이고 있습니다.
선수는 물론 그 부인이나 아이 등 가족까지 유명세를 타기도 합니다. 선수들과 연예인들의 염문이 종종 들리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만큼 야구 선수들이 유명인이 됐고, 일부 신인급 연예인이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야구 선수들과 엮는 경우도 있다는 후문입니다.
올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박석민이 4년 최대 96억 원에 NC 유니폼을 입으면서 '100억 원 시대'가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정우람(한화)은 불펜 투수이면서도 4년 84억 원에 한화와 계약했습니다. 김태균(한화) 역시 33살 비교적 높은 나이임에도 4년 84억 원에 사인했습니다.
사실 2000년대만 하더라도 리그 톱을 다툴 만한 고연봉 선수는 각 구단에 1~2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특히 2012시즌 뒤 FA들이 대거 몰리면서 연봉 10억 원 안팎의 선수가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MVP급 선수가 아니더라도 KBO 리그에서 잘만 하면 수십억 원의 잿팟을 터뜨릴 수 있는 시대가 온 겁니다.
4년 8~90억 원이면 1년에 20억 원 이상 몸값입니다. 이 정도면 일반 직장인들의 꿈인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임원 연봉 부럽지 않습니다. 게다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일반인이라면 이제 막 사회 생활을 접했거나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나이에 거액을 만지는 겁니다. 40~50대에 임원이 되는 일반 직장인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유명세와 몸값에서 이미 프로야구 선수들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그 의식까지 높아졌을까
하지만 이에 맞게 선수들의 의식도 자란 것일까요? 불행하게도 아직은 그렇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물론 명성과 연봉에 맞게 성숙한 의식을 갖고 있는 선수들도 분명히 있지만 아직은 미숙한 선수들이 적잖은 게 사실입니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올해 초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 프로야구 선수들이 돈은 많이 벌게 됐지만 어떻게 이를 의미있게 써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아쉬움을 털어놨습니다. 허 위원은 해설위원이기도 하지만 한국야구위원회(KBO) 야구발전위원장도 맡고 있습니다. 야구 발전을 위한 열정만큼은 둘째 가라면 서러운 원로입니다.
강민호가 올해 1월 경남 양산시 야구장 건립을 위해 2억 원을 기부했을 때의 얘기입니다. 허 위원은 "민호가 거액의 FA 계약을 맺은 뒤 야구 발전을 위해 힘을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물어보더라"면서 "그래서 야구 인프라 확충을 위해 부족한 경기장 건립에 쓰면 좋을 것 같다고 했더니 쾌척하더라"고 말했습니다. 강민호 야구장이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허 위원은 "선수가 성공한 것은 본인의 비상한 노력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면서 "그러나 그 선수가 클 수 있기까지는 지도자들과 한국 야구의 인프라가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전제했습니다. 이어 "그렇다면 본인뿐만 아니라 후배들이 이어서 성장할 수 있도록, 또 야구의 입지가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자신이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베풂은 비단 야구에 국한된 게 아닙니다. 앞서 언급한 사회 빈곤층을 위한 기부와 봉사 등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입니다. 허 위원은 "야구는 물론 스포츠 선수들이 운동을 잘 하지만 사실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다"면서 "선수들은 단순히 운동만 잘 한다 이런 게 아니라 성숙한 의식과 도적적 선행 등 지덕까지 갖춘 존경받는 인격체로 인정을 받는 게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래야 어린이들이 야구를 통해 꿈을 이루는 이상이 비로소 실현된다는 겁니다. 선수가 큰 돈을 벌고 또 따뜻하게 베풀면서 존경까지 받으면 그만큼 야구의 꿈을 키울 꿈나무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그런 움직임이 야구 발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된다는 겁니다.
현재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야구계 몸값 거품 논란도 어쩌면 이에 어울리지 않는 품격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해외로 나가 거액의 도박판을 벌인 데 대해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안지만(삼성)은 그동안 야구 용품 기부 등 선행도 도박으로 묻히게 됐습니다.
▲품행도, 기부도 이제는 야구 강국에 걸맞아야
비단 기부뿐만 아니라 야구 선수들은 품행도 이제는 가려야 할 시대가 왔습니다. 일거수 일투족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까닭입니다.
최근 불거진 SNS 파문은 사실 일반인 사이의 대화라면 세간의 저급한 농담을 주고받았던 정도로 넘어갈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안 보이는 데서는 나랏님 욕도 한다는 말도 있지요.(아, 요즘은 아닌가요? 잡혀갈까요?) 하지만 공개가 됐고, 프로야구 선수이기에 문제가 됐습니다. 팬들 사이에서 퍼진 게 일파만파 커졌고, 결국은 피해자 본인의 귀에게까지 들어가 법정으로 가게 됐습니다.
최근 부쩍 자주 접하는 선수들의 음주 사건도 같은 맥락입니다. 프로야구 선수라 화제가 되고 문제가 돼서 시즌을 접게 되는 징계를 받아 불행하게 귀결됩니다. 연예인 못지 않게 이런 사건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기부 문화가 완전히 자리잡은 미국에 비해 한국에서 온정의 손길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듯, KBO 리그도 메이저리그에 비할 바가 아직은 못 됩니다. 류현진의 팀 동료 클레이튼 커쇼는 매년 1억 원 이상을 아프리카 교육 사업에 기부하고, 실제 날아가 봉사 활동을 펼쳐 로베르토 클레멘테상을 받았죠. 또 최근 고향 야구장 건립을 위해 기부했고, 쿠바 지역을 방문해 역시 기부와 봉사 활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커쇼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는 1972년 중남미 구호 활동을 하다 비행기 사고로 숨진한 로베트로 클레멘테를 기리기 위해 1973년부터 매년 사회 공헌 활동에 기여한 선수에게 이 상을 수여합니다. 원래는 1971년부터 제정된 상의 명칭을 바꿨습니다. 올해는 강정호의 동료 앤드루 매커친이 받았습니다. (KBO도 1999년부터 사랑의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습니다.)
류현진 역시 선행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고향 인천에 야구장 건립을 위해 기금을 조성하고 있으며 지난해 세월호 사태 때는 1억 원을 쾌척하기도 했습니다. 메이저리그 선배 추신수(텍사스)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어린지재단에 1억 원 이상을 기부했습니다. 이들에 앞서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선구자답게 야구 선수로 처음으로 재단을 만드는 등 사회 공헌에서도 가장 앞서 있습니다.
어쩌면 현재 일부 선수들은 급격하게 상승한 야구의 위상과 그동안 교육받은 가치, 행동규범 사이의 괴리감에 빠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최근 일련의 불미스러운 일들은 어쩌면 그들만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야구계, 혹은 교육 전반에 걸린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야구계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위상이 높아진 시대, 그에 어울리는 인성과 품격을 갖춘 선수들이 솔선수범해 야구계는 물론 사회 전체의 롤 모델로 우뚝 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p.s-서두에 언급한 치어리더는 자신을 음해한 선수를 고소한 데 대해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를 하고 싶지도 해서도 안 된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야구장에는 치어리더와 리포터, 배트걸 등 여성 노동자들이 있다. 모두 야구를 사랑하며 가슴 속에 '야구인'이라는 단어를 품고 산다. 그런데 내가 용서하면 이들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야구인이라는 긍지를 갖고 고된 일을 이겨내는 치어리더. 이들도 이런 단단한 자부심으로 야구 발전을 위해 나설진대 하물며 그 야구를 본업으로 삼고 있는 선수들임에랴. 보다 더 큰 책임과 의무를 안고 그라운드에 나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또 이번 레터는 야구를 주제로 띄웠지만 사실은 대한민국 스포츠 전 종목에 해당하는 편지가 아닐까 합니다. 금지약물에 이어 음주 사고가 터졌던 축구를 비롯해 불법 스포츠 도박 홍역을 치렀던 농구, 최근 불미스러운 일로 감독 사퇴 사건이 일어난 배구 등 프로는 물론 애국 응원을 받는 아마추어 종목까지.
자신의 종목에 대한 자부와 긍지를 갖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고, 또 국민적 성원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 비로소 진정한 선수가 완성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