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1월의 첫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LA 레이커스는 해를 넘겨 1972년 1월9일 밀워키 벅스를 만나기 전까지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 이 기간에 무려 33연승을 질주했다.
골든스테이트의 연승 기록은 NBA 역대 최다연승 부문 단독 2위에 해당한다. 올 시즌 개막 24연승 무패행진을 달렸고 지난 시즌 막판 4연승을 더해 28연승을 기록했다. 1971-1972시즌 레이커스는 단일시즌에 33연승을 질주해 기록의 가치가 더 높다는 평가다.
한 경기 100득점, 시즌 평균 50점을 기록했던 당대 최정상급 센터 윌트 채임벌린, NBA 로고의 주인공 제리 웨스트, NBA 최초의 스몰포워드로 불렸던 엘진 베일러 등 당시 레이커스 선수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33연승이 선수들의 개인 능력 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베일러는 프로 13년차, 채임벌린은 12년차 그리고 웨스트는 11년차의 베테랑이었다. 다들 전성기가 지났다. 설상가상으로 베일러는 부상 때문에 1971-1972시즌 개막 후 9경기 만에 은퇴를 선언했다.
1960년대 보스턴 셀틱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빌 셔먼 당시 레이커스 감독은 팀 플레이와 조직력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보스턴의 팀 컬러를 레이커스에 적용하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21세기 최고의 팀 플레이어'로 뽑혔던 1950-1960년대 보스턴의 전설 빌 러셀(리그 8연패를 이끄는 등 총 11번 우승을 차지했다)의 역할을 해야했다. 셔먼 감독은 러셀의 라이벌이었던 채임벌린에게 그 역할을 맡아주기를 주문했다.
채임벌린은 응답했다. NBA 사상 최고의 득점 기계는 팀내 4번째 공격옵션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채임벌린은 데뷔 후 처음으로 10점대 평균득점(14.8점)을 올렸다. 그러나 리바운드 부문 리그 1위(19.2개), 야투성공률 리그 1위(64.9%)에 오르며 팀에 공헌했다.
또 셔먼 감독은 젊은 선수들의 발전과 득점 루트의 다변화를 위해 웨스트에게도 색다른 주문을 했다. 리그에서 어시스트가 가장 많은 선수가 되면 좋겠다는 요청을 한 것이다. 웨스트 역시 응답했다. 웨스트는 데뷔 후 가장 많은 평균 9.7개의 어시스트를 올리며 기대에 부응했다. 예년에 비해 조금 떨어졋지만 평균 25.8점을 올려 특유의 득점력도 유지했다.
셔먼 감독은 당시 28세의 가드 게일 굿리치를 팀내에서 가장 슛을 많이 던지는 선수로 만들었다. 득점에 재능이 있었던 굿리치는 웨스트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한 단계 더 성장했다(굿리치는 1970년대 말 뉴올리언스 재즈로 트레이드 된다. 레이커스가 이때 재즈로부터 받은 지명권으로 영입한 선수가 바로 매직 존슨이다).
베일러의 은퇴는 위기가 아닌 기회였다. 셔먼 감독은 짐 맥밀란이라는 2년차 포워드를 즉각 주전으로 기용했다. 그는 화려한 선수는 아니지만 팀을 위해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선수였다.
이처럼 1971-1972시즌 레이커스는 '희생'으로 똘똘 뭉친 팀이었다. 정규리그 33연승을 달리며 69승13패로 시즌을 마쳤다. 이는 훗날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가 72승을 거두기 전까지 NBA 단일시즌 최다승 기록이었다. 또 레이커스는 NBA 파이널에서 뉴욕 닉스를 제치고 정상에 오른다.
레이커스의 34연승 도전은 밀워키에 막혀 실패로 끝났다. 당시 밀워키의 센터 카림 압둘자바가 39득점을 올려 레이커스를 압도했다. 골든스테이트의 29연승을 저지한 팀도 밀워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