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후반, 당나라와 손잡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다. 하지만 이후 갑작스런 당나라의 태도 변화에 신라와 당의 관계는 악화되고, 결국 신라는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한다.
670년 3월, 당나라에 맞서기 위해 손을 잡은 신라 장수 설오유와 고구려 부흥군 지도자 고연무. 이들은 각각 1만 명씩 2만의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격한다.
연합군은 오골성에 먼저 와 주둔해 있던 당 휘하의 말갈병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당대 최고 군사 강국이던 당나라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7년간 지속된 나당전쟁의 막이 오른 순간이다.
뛰어난 기동력을 앞세워 적을 제압하던 당나라의 기병을 막아낸다는 것은 신라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라는 당나라에 비해 기병의 숫자가 확연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나라는 신라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4m를 훌쩍 뛰어넘는 길이로 기병의 공격력을 분산시킨 '장창당'과 천보나 되는 거리를 날아가 적을 관통하던 '천보노'의 역할이 컸다. 급기야 당 황제는 669년 겨울, 천보노 장인 구진천을 당나라로 데려갔다.
이후 672년 9월, 신라 문무왕은 포로로 잡고 있던 당군을 당나라로 돌려보내며 당 황제 고종에게 국서를 보낸다. 그런데 그 국서의 내용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굴욕적이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신라의 종묘사직을 늪과 연못으로 만들고, 제 몸을 찢어 죽이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당나라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펼치던 호기 있는 모습과는 달리, 문무왕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이것은 하나의 교묘한 전략이었을까. 문무왕은 주장성을 시작으로 이듬해 10여 개의 산성을 증축하고, 전략가 설수진의 '육진병법' 등 새로운 군사기술도 도입한다.
675년 9월 29일, 당나라의 장수 이근행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 매소성에 주둔한다. 신라와 당,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최후의 결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항하는 신라의 군사는 고작 3만이었다.
엄청난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대승을 거둔다. 이듬해 벌어진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나라를 완전히 몰아낸다.
장장 7년간 이어진 나당전쟁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역서저널 그날에서 짚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