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미학의 소유자인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영화 '크림슨 피크'로 돌아왔다. 영화는 19세기 미국과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통적인 귀족 가치관이 붕괴되고, 자본가 계급이 힘을 키우던 시절 가난한 영국 귀족 남매가 미국으로 흘러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표면적으로 영화는 치정극이라고 할 수 있다. 치정극의 주인공은 세 사람, 유령을 보는 소녀 이디스(미아 와시코브스카 분)와 영국 귀족 토마스(톰 히들스턴 분) 그리고 그의 누이 루실(제시카 차스테인 분)이다. 이들 관계를 조금만 들춰보면 그 안에는 처절하고 비참한 욕망과 광기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주요 소재인 유령은 '크림슨 피크'의 비밀을 알리는 자들이다. 시각적으로는 그러할 지라도 영화에서 유령은 해를 끼치는 공포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다. 잘못된 욕망이 만들어 낸 슬픈 부산물일 뿐이다. 그들은 모두 어떤 존재 이유를 가지고 등장한다. 그리고 극중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며 끊임없이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크림슨 피크'라는 별명을 가진 대저택은 또 다른 주인공이다. 붉은 진흙 속에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저택은 철저히 고딕 양식을 따랐다. 하늘이 그대로 보이는 뚫린 천장은 올려다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을 압도하고, 곳곳에 죽은 벌레 따위가 나뒹굴면서 황폐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낡고 거대한 저택은 이디스가 파헤치는 모든 미스터리를 집대성한 공간이다. 저택 공간 하나 하나가 주는 몰입도는 상당하다. 카메라는 유령과 함께 욕실, 침실, 부엌, 두 남매가 어린시절을 보낸 다락방, 토마스의 작업실, 진흙 광산 등을 따라다니며 비밀을 보여주고 감추길 반복한다.
저택은 현실과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드넓은 대지는 흰 눈으로 뒤덮이고, 몰아치는 광기는 기어코 그 위에 진흙과 닮은 붉은 피를 뿌린다. 감독이 의도한 색의 대비는 독특한 구도와 클로즈업을 만나 강렬하게 영화를 뒤흔든다.
감독은 옛 무성영화들에서 영화를 더욱 '고딕스럽게' 만드는 장치를 가져왔다. 한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막을 내리는 것처럼 어느 한 곳에 초점을 맞춰 화면을 블랙아웃시키는 방식이다. 이런 독특한 기법을 통해 감독은 복선과 단서를 제공한다.
실제로 감독은 '크림슨 피크'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대단한 반전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대놓고 힌트를 주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미학적으로는 볼거리가 많지만 그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시시한 이야기에 지나치게 과대 포장을 해놓은 느낌일 수도 있다.
다만 감독이 추구하는 미학적 연출로 인해, '막장'스러운 '크림슨 피크' 가족사와 애정사가 몽환적인 미스터리 드라마로 재탄생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인간이 유령보다 공포스러운 존재라는 이 잔혹동화의 결말은 슬픈 판타지를 통해 인간 본질을 파고든다. 오는 25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