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집단인 '어나니머스'(Anonymous, '익명'이라는 뜻)가 프랑스 파리에서 테러를 자행한 이슬람국가(IS)를 상대로 ‘응징’에 나서고 있다. 이 그룹은 최근 유튜브에 올린 공식 영상에서 이들은 IS의 트위터 계정 2만 개 이상을 찾아내 폐쇄했다고 주장했다. (https://youtu.be/ZfyVVLGWivo)
2003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어나니머스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구성원이 TV 방송을 하듯 대중들에게 공식 메시지를 전하는 동영상을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
영국에서 전통적으로 민간이 사용해온 '가이 포크스' 가면은 1980년대 나온 그래픽노블(graphic novel, 만화형태의 소설)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벤데타는 '피의 복수'라는 뜻)'에서 주인공 '브이(V)'가 썼고, 이 작품을 토대로 2006년 미국에서 동명의 영화가 제작돼 배포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난해 홍콩의 우산시위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각종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이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가이 포크스 가면은 저항의 아이콘이 됐다.
◇ 가이 포크스(Guy Fawkes, 영국, 1570년 ~ 1606년)
가이 포크스는 영국에서 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는 성공회가 수립된 뒤(1534년 수장령) 가톨릭 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진 상황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당시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왕이던 제임스 1세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화약음모사건(Gunpowder Plot)'의 가담자였다.
20대 초반부터 10년간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참여해 군인 경력을 쌓은 가이 포크스는 이 음모에서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영국 상원이 개원하는 1605년 11월 5일에 웨스트민스터 궁 지하실에서 폭약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뒤 도피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음모자 중 누군가가 가톨릭 신자인 한 상원의원(Lord Monteagle)에게 익명으로 조심하라며 보낸 편지가 왕에게까지 전해지면서 11월 5일 이른 시간에 웨스터민스터 궁 지하실에 대한 수색이 벌어졌고, 장작 더미에 가려진 폭약통 36개를 홀로 지키고 있던 가이 포크스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큰 키와 건장한 체구에 '싹싹하고, 유쾌하며, 다투기 싫어하고 친구들에게 의리 있는' 인물로 지인들의 증언에서 묘사되고 있는 가이 포크스는 붙잡히고도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존 존슨'이라는 가명을 댄 그는 '그 많은 폭약을 가지고 뭘하고 있었느냐'는 조사관의 질문에 "너희 스코틀랜드 거지들을 고향 산으로 날려 보내려 했다"고 대답했고, 이에 감탄한 제임스 1세 왕은 그를 '로마인의 기개(a Roman resolution)'를 가진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체포 직후부터 닷새동안 이어진 고문에 결국 굴복해 암살계획과 연루자의 이름을 모두 자백했고 이듬해인 1606년 1월 31일 폭파하려던 웨스트민스터 궁이 바라보이는 광장에서 다른 공범 셋과 함께 극형에 처해졌다.
가이 포크스가 체포된 11월 5일 영국 왕실은 런던 시민들이 모닥불(bonfire)을 피워 왕의 암살 모면을 축하하도록 했고 의회는 이 날을 아예 기념일로 지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로 이 날은 영국에서 '가이 포크스의 밤', '음모의 밤', '모닥불의 밤'으로 불리며 주민들이 모닥불과 함께 폭죽을 터뜨리며 대중들이 싫어하는 인물의 인형을 불태우는 일종의 축제일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날엔 대부분 교황이나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씌운 인형이 불태워졌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폴 크루거 남아공 전 대통령 혹은 마거릿 대처 전 수상의 인형이 불태워지기도 하는 등 '화형'되는 인물의 상징이 때에 따라 변하기도 해왔다.
가이 포크스는 역모를 꾀한 13인 중의 한 명에 불과했지만 극적인 체포와 고문, 처형 그리고 기념일 지정 등의 과정을 거쳐 반역의 주모자처럼 여겨지게 됐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영국 역사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긍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20세기 초엔 '가이 포크스의 소년시절' 같은 어린이용 책이나 싸구려 대중소설이 나오면서 가이 포크스의 '무지막지한 반역자'라는 이미지는 '활극의 주인공( action hero)'으로 점차 변용됐다.
그리고 현대의 대중문화에서 가이 포크스의 얼굴을 본뜬 가면은 저항이나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 '저항의 아이콘, '가이 포크스' 가면의 유래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