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 쫓는 눈먼 사극…주위 둘러볼 '템포' 필요한 때"

[요즘 사극 왜 이래 ②] 사회학자 노명우 "현실 외면 '오인체계'로 작동"

여러분은 최근 영화나 TV 등에서 소개되는 사극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그 사극 괜찮던데"라는 말보다는 "요즘 사극 왜 이래"라는 푸념이 더 자주 들려옵니다. "사극의 맛과 멋이 없다" "현대물과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주를 이루는데요. CBS노컷뉴스가 고전평론가, 사회학자, 역사학자와의 연속 인터뷰를 통해 사극의 현재를 짚어봤습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고전평론가 고미숙 "욕망에 찌든 사극…언제까지 권력과 性 동경하랄 텐가"
② 사회학자 노명우 "스피드 쫓는 눈먼 사극…주위 둘러볼 '템포' 필요한 때"
③ 역사학자 오종록 "영웅 키우는 사극…신분차별 여전한 한국사회 맨얼굴"

(사진=MBC 제공)
문화·예술·미디어 분야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사회학자 노명우(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예전에 '대장금'(2003년 9월~2004년 3월 방영) 본방 사수를 위해 일을 마친 뒤 늦을까봐 택시 타고 집에 들어가곤 했다"며 웃음을 보였다.

"사극 대장금의 주 무대가 궁궐이긴 하지만, 주인공이 끊임없이 궁 안팎을 드나들면서 펼쳐지는 풍경을 통해 당대 생활사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거든요. '궁이란 뭘까' '궁녀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라는 물음과 함께, 극중 평범한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 시대에 대한 커다란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죠.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당대 신분제도 아래 그들이 겪었을 한계와 이를 뛰어넘으려는 노력도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방송 다음날 사람들과 대장금에 대해 나눌 얘기가 정말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 서울 서소문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노 교수는 "대장금 이후로는 TV 사극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뚜렷한 콘셉트, 그러니까 주제의식을 갖고 그에 맞는 인물들을 불러낸 뒤 에피소드를 구성해야 하는데, 최근 많은 사극이 단순히 에피소드만 나열하는 분위기여서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사극은 다큐멘터리가 아니잖아요. 역사를 100%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러니 옛 이야기를 접하면서도 현재의 관심사를 바탕에 두고 볼 수밖에 없는 게 사실입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현실을 환기시켜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최근 사극에서는 그러한 동시대성이 느껴지지 않아요."

그는 지금의 사극에 대해 "시청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품"이라는 표현을 썼다. 사극의 주요 시청자층이 중년 이상 남성인 점과 '영웅 판타지'를 입힌 무협지 같은 사극이 주를 이루는 이유도 여기서 찾았다.

"출판계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어요. '역사책의 가장 큰 수요자가 40대 중년 남성'이라는 거죠. 사회구조적으로 한국 남성은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 사이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직장에서 간부로 승진하느냐, 아니면 퇴사하느냐라는 터닝포인트를 40대 중반 이후에 맞이하니까요. 승진해 간부가 된 남성은 승리자로서 역사책을 읽으면서 흐뭇해 할 것이고, 퇴사해 다른 일을 하는 이들은 현실에서 잃어 버린 영향력을 역사책에서 간접적으로 찾을 수 있다는 설명도 설득력이 있어 보여요. 사극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노 교수에 따르면, 현실에서 자기통제력이 약해지거나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드는 소위 '위기의 중년들'은 군중을 호령하고 난세를 구하는 영웅적인 인물에 대해 상대적으로 몰입도가 높다. 이에 따라 영웅호걸 이야기가 사극의 기획 의도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최근 '육룡이 나르샤' 등 인기 있는 젊은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운 사극이 등장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수요층을 넓히려는 전략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내놨다.

"우리는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배운 탓에 '뛰어난 위인들의 이야기가 역사'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상이 의외로 잘 그려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겠죠. 역사를 인물과 동일시하다보니 생활사, 민중사 등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려는 감각이 없어요. 역사에 대한 궁금증이 단순 에피소드로 환원되거나 축소되는 셈이죠. 사극 역시 그 틀 안에 있다고 봅니다."

◇ "자기 개입 필요한 '감상' 지운 자리에 수동적인 행위로서 '소비'만 남아"


아주대 사회학과 노명우 교수(사진=노컷뉴스/자료사진)
그는 한국 드라마의 가장 강력한 정서로 인과응보, 권선징악 메시지를 강조하는 신파성을 꼽았다. 사극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장희빈이나 연산군과 같은 문제적 인물이 사극 안에서 끊임없이 다뤄짐으로써 '결국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지금의 현실 구조 안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왜곡된 인식을 심어 준다는 것이다.

"일종의 '오인체계'죠. 예를 들어 장희빈의 죽음은 당대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텐데도 오롯이 '못된 짓을 했으니까'라는 개인의 잘못으로 환원됩니다. 그렇게 인과응보로 만들어 버리는 거죠. 실제 역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이러한 오인체계는 권력자의 지배를 영속화하는 데 편리하게 활용됩니다. 피지배자에게도 심리적인 위안을 주죠. 결국 그렇게 현실 외면을 정당화시키는 겁니다."

노 교수는 "우리 시대의 사극은 인류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서사시, 서사극이 수행해 온 역할과는 다른 기능에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사극은 비즈니스를 창출하는 아이템이 됐다는 것이다.

"자본의 개입으로 최근의 사극은 웅장하고 화려한 스펙터클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겨요. 스펙터클이 사극을 단순히 소비하도록 만드는 거죠. 자기 개입이 필요한 '감상'을 지운 자리에는 굉장히 수동적인 행위인 '소비'만 남습니다. 소비로 시장을 확장하기 위해 자본은 끊임없이 새로운 욕구를 자극하는데, 여기서 감상의 영역을 필요 없게 만드는 스펙터클이 큰 역할을 하는 셈이죠."

그는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무욕'(無慾)을 요구하지 않는다"며 "그래서 '욕망을 가져야 한다'는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한다"고 했다.

"물론 사람은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욕망하지 않을 욕망, 즉 무욕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자본은 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욕망의 대상이 상품과 소비라는 형태로 나타나야 하니까요. 자본이 요구하는 대로만 자신의 욕망을 채웠을 때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됩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물질을 탐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태도'라는 욕망에 대한 억압이 있었어요. 하지만 현재는 무욕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억압을 받습니다. 과거에는 '꼰대' 소리 들었을 법한 언행이 지금 시점에서는 급진적인 자세가 된 거죠. (웃음)"

이러한 사회의 모습이 오롯이 사극 안에 투영되고 있다는 것이 노 교수의 견해다. 그는 과거 권력 시스템 안에서 패배자로 귀향을 가거나 스스로 시스템에서 벗어나 무욕의 삶을 실천했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사극에 반영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찾았다.

◇ "자본의 요구 '욕망하게 만들라'…막장 드라마 체계 안으로 흡수되는 사극"

사극 '육룡이 나르샤' 스틸컷(사진=SBS 제공)
노 교수는 '속도'와 '템포'라는 개념을 통해 현대인의 욕망을 흥미롭게 설명했다. 세상이 돌아가는 객관적인 속도를 스피드라고 한다면, '나'라는 주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속도가 템포다.

"소위 감나무골에서 태어나 농부로 살다가 죽은 사람들에게는 지루하지 않았던 삶이, 대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지루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야만 하고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예전 사람들과는 다른 템포로 무장된 거죠. 템포는 개인의 사유 능력에 큰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KTX열차 안에서 승객들은 어느 순간부터 바깥 풍경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대인의 삶 자체가 KTX를 타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KTX처럼 달리는 사회의 자극에 템포를 100% 맞추면 사유는 정지합니다. 자기보존의 메커니즘에 따라 멍 때리는 거죠. 그렇게 갈수록 성찰의 시간을 잃어 버리고 있는 게 현대인입니다. 개인이 스피드를 조절할 수는 없지만, 템포는 통제 가능해요. 각자의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한 템포 늦춘 삶을 사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최근의 사극은 "끊임없이 욕망하게 만들라"는 자본의 요구에 따라 스피드를 쫓고 있다는 것이 노 교수의 해석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흔히 말하는 막장 드라마의 체계 안으로 사극이 흡수되고 있는 중"이다.

"막장 드라마의 특징은 황당한 설정으로 극의 전개를 몹시 빠르게 가져간다는 점이죠. 사람들이 욕하면서도 막장 드라마를 시청하는 이유는 줄거리의 스피드에 따라가다 보니 사유를 정지시킬 수밖에 없다는 데 있어요. 최근 사극에서 막장 드라마처럼 템포를 버리고 스피드에 충실하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기 템포를 버리고 스피드만 쫓는 이러한 흐름은 몹시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극단적인 혐오문화를 강화하는 기제가 되니까요. 성숙한 사회는 혐오의 대상이 생겼을 때 '왜 혐오하게 됐을까'라는 비판적인 성찰이 앞서요.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스피디하게 혐오의 대상을 바꿔가며 공격합니다. 성찰 없는 사회는 욕망에만 충실한 반지성적인 방향으로 시스템을 악화시키니까요."

노 교수에게 '자본의 요구에 충실한 사극이 아닌, 문화로서 의미를 지닌 사극의 밑그림을 그려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질문을 던지는 사극, 대화를 불러일으키는 사극"이라고 답했다.

"한 사회의 좋은 문화는 구성원들에게 '의미 있는 삶이 뭘까' '그 의미가 돈은 안 되더라도 왜 나에게 중요할까'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문화는 '21세기 성장산업'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관해 묻도록 만드는 거니까요. 현재 사극이 문화로서 의미 없다고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좋은 사극이라고 평가내릴 수 있는 기준은 그 사극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후에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이야깃거리를 제공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봅니다."

그는 사극을 비판적으로 대하는 자세에 대해 "나에게 주어지는 무수히 많은 자극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찾아내려는 성찰"이라고 강조했다.

"무언가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특정 시점에 생긴 나의 욕망이 왜, 어떻게 생겼는지를 돌아보는 겁니다. 그러한 비판적인 자세는 우선적으로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고 봐요. 상당수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신을 지배하게 된 욕망의 뿌리를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내 안에 들어찬 욕망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 그것이 욕망으로 가득한 사극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현명한 자세를 유지하도록 도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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