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레터] "머리가 아닌 몸으로"…美 화재 대피 훈련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자료사진)
지난달 30일 오전 미국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의 한 고등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가 발생한 곳은 화학 실험실. 교사가 이른바 ‘무지개 실험’이라고 불리는 물질 연소 반응을 시연하다 그만 불꽃이 크게 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교사와 학생 5명이 부상을 입었고 이중 학생 2명은 화상의 정도가 심해 헬기로 화상전문 병원으로 이송됐다. 가장 안전해야 할 학교에서, 그것도 수업 도중 화재가 발생한 만큼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 지역 주민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하지만 사고 발생 직후 학교 측의 대처법은 두 가지 면에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우선 대피 과정이다. 화재 경보가 울리자마자 학생들은 수업을 멈추고 학교 건물 밖으로 대피를 시작했다. 2200여명의 학생들이 풋볼 경기장과 테니스장 등 외부로 모두 빠져나오는데 걸린 시간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의 미국 학교들이 그렇듯이 이 학교 역시 2층 건물에 출입구가 곳곳에 배치돼 있어 대피에 용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도 뛰지 않았고 차례대로 걸어서 정해진 출입구로 속속 빠져나왔다. 지역 언론들도 대피 과정에서 학생과 교직원들이 보여준 재빠르고 침착한 대응을 높이 평가했다. 사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날 화재 경보를 실제 상황이 아닌, 대피 훈련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미국 내 학교들은 한달에 2~3번씩 화재 대피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보름에 한번 꼴로 수업 도중 경보음이 울리고 그 때마다 학생들은 정해진 동선에 따라 건물 밖으로 나오는 훈련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한 교사는 “계속해서 훈련을 하는 이유는 대응 방법을 머리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몸이 익숙해져서 당황하기 쉬운 위기 상황에서 저절로 움직이도록 하는데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다양한 상황에서 대응이 가능하도록 훈련 때마다 화재 발생 장소는 변경된다. 또 대피 후 학생들은 정해진 장소에서 반드시 ‘출석 체크’를 하도록 하고 있다. 신속한 구조 작업을 위해서, 또 소방대원들이 불필요한 구조작업에 나섰다가 희생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이날도 학생들은 평상시 훈련 과정을 그대로 반복했을 뿐이다. 다만 학생들은 대피 시간이 계속 길어지는 것에 의아해했고 급기야 환자 이송용 헬기가 출동한 이후에야 실제 상황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대피 과정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던 또 한 가지는 학교의 소통 방식이다. 학생들이 건물에서 모두 빠져 나오고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후송된 직후 이 학교 모든 학부모들은 일제히 문자메시지와 이메일 연락을 받았다. 화학 실험실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학생들이 건물 밖으로 대피해 있다는 사실, 5명의 부상자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해당 학부모에게는 모두 연락 갔다고 알리는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소방 당국과 위험물 관리팀이 학교 건물 안을 점검하고 있다는 안내, 이후 학생들이 다시 학교 건물로 들어갔다는 소식, 부상자들의 상태가 호전돼 1명을 제외하고 모두 퇴원했다는 등의 사실(fact)들도 계속해서 업데이트됐다. 주말에는 화재로 인한 학사 일정 변경 여부, 심리적 충격을 받았을 학생들을 위한 상담 프로그램 운영 계획 등에 관해 안내가 이뤄졌다. 이와는 별도로 패어팩스 카운티 교육청은 관내 학부모들에게 문자와 이메일을 통해 화재 소식을 전파했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정보가 제공되자 학부모들은 불안감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학교 내 화재와 같은 사고는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동시에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피해와 희생을 최소화하는 것 역시 대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관건은 실전 같이 훈련한 뒤 실전에서는 훈련한 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1년에 1~2번 정도, 딸아이의 표현에 따르면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큼’ 화재 대피 훈련을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피 훈련은 당장 뭔가를 보여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 그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결정적 한방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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