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12번지의 '부여슈퍼'. 이 가게와 몇몇 살림집,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연립주택, 작은 공장으로 이뤄진 작은 블럭은 주위를 좁은 길이 한 바퀴 두르며 나 있는데다 고층아파트와 건물, 공사가 한창인 뒷편 아파트 부지에 둘러싸여 있어 마치 섬 처럼 보인다.
부여슈퍼 이야기를 페이스북 페이지 개설을 통해 시작한 사람은 중견 작가 신지영씨다. 신지영 작가는 2007년 등단한 뒤로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 '새로운 평론가상'을 잇달아 받기도 하고 '너구리 판사 퐁퐁이', '법정에서 만난 역사' 등 전방위적 글쓰기를 통해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장편동화 '짜구 할매 손녀가 왔다'에선 개발 바람에 맞서 오래된 집을 옹골차게 지키는 시골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루기도 했다. 신 작가가 부여 슈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뜻밖에도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출국' 등으로 두터운 팬층을 거느린 가수 하림씨 때문이었다.
하림씨는 그동안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예술인파견사업(기업이나 기관, 단위 프로젝트 등에 예술인을 파견해 창의적 아이디어로 상대를 돕게 하고 재단은 활동비를 지급)에 참여해 프로젝트 기획자로 활동해 오다 '부여슈퍼 프로젝트'를 제안하게 됐다.
그는 부여슈퍼 근처에 살고 있으며 부모님이 이 슈퍼의 단골이기도 하다. 이 프로젝트에선 가수 하림씨와 작가 신지영씨, 화가 겸 조각가 김철유씨 등이 참여해 슈퍼 주인 민경연(55세)씨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토대로 지난 5월부터 10월말까지 6개월간 여러 시도가 이뤄졌다.
▶ 부여슈퍼 프로젝트를 제안한 이유는?
= 하림) "예술인 파견사업에 퍼실리테이터(프로젝트 기획자)로 1년 동안 있었는데요, 여러 가지 제안을 하고 그랬는데 저희 집앞에 부여슈퍼가 있으니까 여기서 뭐 할 게 없을까하고 생각을 했었죠. 왜냐면 워낙 오래됐고,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런데 그 앞에 편의점이 생긴 거예요. 골목은 하난데 구멍가게가 두 개 생긴 거니까. 근데 이런 일들이 여기 저기 다 일어나잖아요. '골목상권' 이런 말도 많이 나오고. 가만 보면 조금 있다가 이거 대결구도 같이 될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그렇다고 어느 한쪽에 힘을 몰아주기도 그렇고. 똑 같이 다 소상공인.. 자영업 하시는 분들인데, 그래서 이걸 좀 부드럽게 만들어 주면 어떨까하고 제안을 했더니 너무 재밌다고들 얘기를 해서 프로젝트를 만들게 됐죠."
▶ 그동안 한 일은?
= 하림) "최근에 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는 집들이 많이 생겼었어요. 옛날 가게가 맥주를 팔면 운치가 있으니 장사가 잘 되잖아요. 그래서 가맥집(길가 맥주집)을 만들자..그래서 이렇게 평상도 만들고 간판도 만들고.. 등도 달고 안주도 팔고 이렇게 할려고 했는데 사업기간도 짧고. 저희가 원래 맥주집 하던 사람들이 아니여서...(웃음)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평상을 만들어 놓으니까 동네 사람들이 오다 가다 자꾸 앉아요. 아주머니는 자꾸 말걸고 인사하고 자연스럽게 동네 사랑방같이 되고. 물론 편의점에도 파라솔 같은 게 있지만 거기는 뭔가 물건 중심이지 사람이 중심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슈퍼마켓은 사람 중심인 거 같아요. 아무래도 정감이 있죠.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 이 프로젝트에 합류한 이유는?
= 신지영) "공모를 보고 하고 싶은 거 택해서 신청하는 건데, 저는 그 당시에 오래된 집을 지키는 내용의 동화를 쓰고 있었어요('짜구 할매 손녀가 왔다'). 그래서 너무 얘기가 잘 맞는 거 같고.. 그리고 이 슈퍼가 40년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저희 동네예요. 그래서 아 너무 잘 됐다 싶어서 바로 신청했죠."
▶ 프로젝트 진행 과정은?
= 신지영) "처음에 화가 선생님과 하림 선생님하고 만났을 때는 추상적으로 생각했어요. 하림 선생님한테 '저희 벽화 그리는 거 아니예요?' 그랬더니 하림 선생님이 '아 그게 별 의미가 없다', 이런 사업 많이 해보셨는데 그런 게 특별한 성과가 되지 않더래요.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실제 도움이 될 수 있는 걸 하는 게 훨씬 낫다고 하셨고 그 때 편의점 얘기도 처음 들었어요.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아주머니하고 얘기하다 보니까 이게 다 어려운 사람끼리 서로 어렵게 하는 거 잖아요. 서로 도와야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으니까..되게 오해가 많이 생기고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걸려 있으니까 마음이 많이 상하게 되고. 또 아주머니는 돈 문제 보다 오던 단골들이 많이 안 오게 되니까 그게 되게 마음이 아프셨었대요. 그것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으셨대요. 그런데 이제 6개월이 지나니까 아주머니도 마음이 좀 풀리시고 '아 이게 결국은 서로 같이 도와야 되는 일이구나' 하는 것도 좀 생각하시고 그래서 처음 목적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하다보니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다들) 좀 변해가고 더 이해하게 된 부분이 있었던 거 같아요."
= 신지영) "일단은 대체적으로 틀만 잡아 놓고 제가 이제 설명을 드려야 돼요. 그러면 이제 가족분들이나 주인분께서 쓰면 되겠죠. 저는 약간 스토리텔링을 했는데, 사실은 살아가는 얘기가 사람들한테 감동을 주는 거 잖아요. 오늘 꽃 하나 피었다, 어디 갔는데 누구 만났다, 그런 얘기 잔잔하게 사진하고 같이 올리시면서 부여슈퍼 얘기하면 그것 자체가 보는 사람들한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또 같이 어려운 처지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한테 '아 그래 우리 서로 같이 고생하고 있구나, 힘 좀 내자' 그런 식으로 하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말씀을 드렸어요. 제가 이렇게 알려드리면 어렵지 않으니까 하시면 될 것 같다고. 그렇게 하기로 했죠."
▶ 처음에 부여슈퍼 보고 어떤 느낌 들었나?
= 신지영) "저는 너무 좋았어요. 정서적으로 그냥 보는 것 만으로도 사실은 조금 힐링이 됐고. 페이지 만들어서 오픈하고 나서 느낀 게 다른 분들도 아주 비슷하신 거예요. 그런 얘기에 위로를 많이 얻으시고 '너무 좋다, 따듯하다, 아 열심히 함께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들 하셔서 아 이게 내 생각만이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거구나 하고 생각 했죠."
▶ 페이스북 페이지 분위기는 옛날 기억이 떠오르도록 하는데 촛점을 뒀나?
= 신지영) "추억을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공존하는 게 사실은 더 좋지 않을까, 서울에서 집이라는 게 '재산'이라는 가치로 밖에 평가를 못 받잖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데 가치의 기준이 사실은 꼭 자본의 논리에 따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래된 것하고 새로운 것하고 아무 문제 없이 서로 섞여서 공존할 수 있으면 그게 제일 가치 있는 것 아닐까 싶어요."
슈퍼주인 민경연씨는 하림씨와 신지영씨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들이 만들어준 평상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더 찾아와 줘서 좋다고 한다.
부여슈퍼에는 특별한 상품이 있다. 민씨의 부군인 전준기(56)씨가 경북 상주에서 운영하는 감 농장(매봉산농장)에서 생산되는 곶감이다. 찬 바람이 불면 부여슈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둥시곶감'이라고 한다. 하림씨와 신지영씨가 감 홍보 좀 하라고 해도 민씨는 쑥쓰러운 웃음을 짓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