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옆집 아저씨였을 때나, 잘 나가는 변호사일 때나 손현주는 달라진 것이 없다. 오랜 세월 바다를 누빈 바다거북처럼 그저 제 역할을 묵묵히 다 해낼 뿐이다.
소박하고 소탈한 인터뷰는 마치 동네 약수터에서 만난 이웃과 담소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곳곳에 숨은 내공 때문에 역시 만만치 않은 고수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일상 연기부터 장르 연기까지 섭렵한 고수 손현주에게도 '더 폰' 시나리오는 고민의 대상이었다.
"죽은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시나리오를 거기까지 딱 읽고 덮었어요. 그 후에는 나름대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까 상상을 해봤죠. 결국은 제 상상과 달랐지만요. (웃음) 촬영하기 오래 전부터 그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더 리얼하게 갈 수밖에 없겠다. 적당히 가서는 관객들에게 설명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야 관객들이 좀 더 이해하고, 편하게 보겠다 싶더라고요."
평이 엇갈린 결말에 대해서도 솔직히 언급했다.
"사실 시사회 때랑 많이 바뀔 수는 없을 거예요. 편집을 바꿀 수는 없는데 관객에게 더 편안하게 다가가게 깎아 놓았을 겁니다. 음악적 부분이나 장치나…. 저희가 본 부분과는 조금 다르게. 아마 시사회 평이 많이 참고가 됐을 거예요. 살짝 다듬은 거지, 많이 변형되거나 뒤틀리지는 않았어요."
전화를 통한 연기는 두 주인공, 손현주와 배우 엄지원 모두에게 풀기 힘든 난제였다. 손현주는 엄지원을 도와 최대한 연기의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엄지원 씨가 상당히 난감해 하고, 힘들어 했었어요. 저도 그렇고 전화로만 이뤄지는 연기 자체가 그렇더라고요. 원래 눈과 얼굴을 보고 연기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녹음실에 가서 함께 녹음을 해보기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요. 앞에서 제스처를 취해주면서 서로 서로 도움을 많이 받았고 엄지원 씨도 안정감을 찾아 갔어요."
손현주는 좀처럼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전화 연기 때문에도 그랬지만 일반 스태프들과 함께 숙소 생활을 자처할 정도다. 통상 감독이나 주연 배우들이 다른 숙소를 잡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다. 연출을 맡은 김봉주 감독도 손현주의 부름을 받고 일반 스태프들 숙소에서 생활했다.
"연기를 맞추려면 있어야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냥 기분 좋게 숙소 생활했어요. 촬영 전 작업이 편안하게 다가오고, 집중해서 촬영할 수 있으니까요. 더욱이 이번 숙소는 세트장 바로 위였거든요. 다른 곳에서 주무시겠냐고 그래서 필요 없다고 그랬죠. 스태프들이랑 붙어 있어야 술도 한 잔 얻어먹고 이야기도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스태프들이 감독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위치도 좋고, 무인 모텔보다는 여기가 나을 것 같아서 김(봉주) 감독도 불렀어요. (웃음)"
"일단 집을 떠나 있었으니까 일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웃음) 그러다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더 사랑스러워요. 떨어져 있는 것도 그 사람을 그리게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아내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잘 받아요. 가끔 바쁘면 못 받을 때도 있지만요. 그런데 고등학교 딸 아이 전화는 무조건 받습니다. 자꾸 딸한테 이야기하다 보면 말을 더듬게 되더라고요. 거짓말이 아닌데도 꼼짝을 못하겠어요."
특히 고등학생인 딸은 그의 절대적인 조력자다. 은근히 딸 자랑을 하는 손현주에게 팔불출 아버지의 기운이 가득했다.
"제 딸이 작품을 참 잘 봐줘요. 재밌는 건 재밌다고 하고, 재미 없는 건 재미없다고 하고. 시나리오를 놔두면 항상 그 자리에 있으니까 딸이 나 몰래 보나 봐요. 음악 전공하고 있는데 매니저를 해도 잘 할 것 같아요. 가끔 시나리오나 대본을 보다 웃을 때가 있어요. 그럼 제가 뭘 알고 웃냐고 그러죠. (웃음) 이번에 '더 폰'도 딸이 봤어요. 어떻게 연기할지 고민을 이야기했는데 그 때, 그 때 진정되고 진실된 걸로 가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다른 어떤 현실적인 영화보다 진중하고, 절실하게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5년 동안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걸었던 배우의 길. 아마 베테랑이 있다면 손현주 같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손현주는 항상 '불안'한 마음을 갖고 연기에 임한다. 쉽고 편안한 길은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두려움을 항상 해결이 되어야 하는 문제죠. 해결이 안되면 어떡하지? 이런 불안한 마음을 갖고 연기를 해요. 보는 사람들이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저는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해요. 연기하는 사람이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김이 확 빠지는 거죠.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 건 말도 안되게 부딪치는 상황 때문인 것 같아요. 어떻게 저 사람이 해결하고 헤쳐나갈까. 지금까지 했던 배역들도 변호사든, 대통령이든 썩 편하게 다니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편안하게 다가오는 게 있었으면 제가 거부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손현주에게 연기는 곧 '책임'이다. 매사 다정하고 너그러운 그가 자신의 일에는 엄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격이 빈틈 없지는 않아요. 그런데 제 스스로 거짓되게 했든지, 연기적으로 충만하지 않은데 그 정도면 대충 된 거 아닌냐고 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제 성격이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자꾸 저 스스로한테 질문을 던져요. 왜 그렇게 밖에 못하는지. 이 연기도 해보지 않은 놈이 어떻게 할 건지. 이번에도 뛰어내리면서 손톱이 빠지는 부상을 입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좋아서 선택한 걸 누구 탓을 하겠어요. 제 선택이니 제 책임이죠. 연기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책임을 져야 해요."
"저 사람이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을 놓고 보게 되잖아요. 원래 제가 불편한 걸 싫어하거든요. 앉아서 술 한 잔 먹으면 저도 그냥 대중이에요. 배우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일반인들이고,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시대의 대변자이면서 어떤 그림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죠. 제 영화를 중년 부부 관객들이 봐주시는 건 저라는 배우에 대한 친근함 때문 아닐까요? 편안하고, 오래된 감정을 갖고 갈 수 있죠. 제가 까칠하고 다가가기 힘든 배우였으면 지금까지 이렇게 못했을 것 같아요."
늘 자신을 깎아 내고, 남에게 나누는 일에는 익숙하다. 연극 무대에 처음 섰던 순간부터 손현주는 그랬다.
"제가 100원을 벌어서 100원을 다 썼으면 아마 많은 사람들과 등지고 있겠죠. 나누고 살아야지 그렇게 살면 쓰겠습니까. 지칠 때도 있죠. 그런데 연극했을 때부터 '네깟 게 뭐냐?' 이렇게 생각해요. 네깟 게 힘들면 얼마나 힘드냐 이거예요. 갈비뼈가 부러지면 그냥 놔둬야 되거든요. 며칠 전에 갔더니 잘 붙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된 거죠. 스스로 채찍질을 많이 해요.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부상을 당해도 금방 치유가 되더라고요."
크고 작게 인연을 맺은 후배 배우들에게는 친구 같은 선배를 자처한다. 자신에 대한 칭찬은 한 마디도 없었지만 배우 배성우, 문정희, 공효진, 박서준 등에게는 진심 어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각 후배마다 이유도 모두 다르다.
"(배)성우는 여백이 채워질 곳이 많은 배우죠. 보여줄 게 많은 배우라고 생각해요. 문정희 씨는 남자 배우들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진 대단한 배우입니다. 공효진 씨도 마찬가지고요. 훌륭한 배우들이에요. 굳이 자기 색을 갖고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펼쳐 놓잖아요. 저는 그 날것의 모습이 너무 좋아요. (박)서준이는 요즘 잘 나가죠? 정말 예뻐요. 배우의 틀이 잘 가꿔지고 있어요."
다른 러브콜을 뿌리치고 키이스트에 간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배용준이라는 배우와의 인연이 선택을 좌우했다. 손현주의 정 많은 인간관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기획사 몇 군데에서 제안이 왔죠. (배)용준이는 드라마 '첫사랑'에서 처음 봤는데 지금도 친하게 형, 동생하고 지내는 사이거든요. 그래서 기왕이면 키이스트 쪽으로 같이 해보자고 결정을 내렸어요. 후배들한테는 친구 같은 선배이길 바라요. 그냥 소주 한 잔 편하게 함께 마실 수 있는. 방송이든 영화든 주위에 선후배들이 많은데 그냥 편하게 본인이 친구라고 생각하고 내려놓으면 간단한 방법입니다."
이 시점에서 손현주의 소박한 소원은 '더 폰'이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이다. 그러면 기자들에게 '쓴' 소주를 대접하겠다는 공약도 내걸었다.
"손익분기점을 넘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정말 즐거운 일이죠. 남의 돈을 모아서 찍었는데 손해를 보지 않고 끝나는 거니까요. 그러면 쓴 소주를 대접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