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금강산 가게 됐어요."
이 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워 전화 속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하지만 수화기 넘어 아들의 목소리는 똑똑하게 들렸다고 말했다. 금강산을 가게 된다는 것은 북녘에 두고 온 아내와 3남매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꿈에도 그리던 만남이 65년 만에 이뤄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기쁨과 슬픔은 교차했다. 자신보다 7살 어렸던 북녘의 아내 한동녀 씨는 20년 전 숨졌다. 여동생 리보배 씨 역시 유명을 달리했고, 북한군 징집을 피해 함께 남녘을 향해 달렸던 동생 이종선(91) 씨는 생사조차 알 수 없다고 했다. 태어난 지 일 년도 안 돼 생이별을 한 막내딸(65)은 사는 내내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확인불가능'이라는 게 북측의 답이다.
그래도 이 할아버지는 북녘의 큰아들(리동욱·70)과 손자(리용진·41)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다. 북을 떠날 때 이 할아버지의 나이는 33살. 다섯 살이었던 큰아들이 벌써 칠순이 됐지만 만나거들랑 '잘 살았냐'고, 그리고 '건강하게 잘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이 할아버지는 얘기했다.
◇ 운명의 날, 1950년 9월 초하루
아무리 기억이 흐려져도 그날은 지금도 눈앞에 펼쳐지는 현장처럼 생생하다. 1950년 9월 초하루 정오, 황해도 곡산군 이영면 거리소리의 자택. 점심식사를 마칠 때쯤 북한군이 집에 들이닥쳤다. 손에는 징집영장이 들려있었다. 집 뒷문으로 동생 이종선(당시 25살) 씨와 함께 부리나케 줄행랑을 쳤다.
북한군을 피해 동생과 함께 사나흘 동안 야산을 헤매는데 먹을 것도 없고 한계가 닥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잡히면 내가, 내가 잡히면 네가 가족을 챙기자. 지금은 흩어지자."
이 할아버지의 제안은 동생과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됐다. 남으로, 남으로 향하다 발이 멎은 곳이 지금의 경남 사천시. 흘러 흘러 이듬해인 1951년 이 할아버지는 전북 진안군 진안읍에 정착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을 가로막는 휴전선이 그어진 1954년 이 할아버지는 지금의 부인 양복례(86) 씨를 만났다. 6남매를 키우며 남녘에서의 60여년의 삶이 그렇게 훌쩍 지나갔다.
"어린 것들, 철모르는 것들 두고 떠났는데 그 애들이 벌써 60이 넘어 70고개가 돼. 이게 어찌된 일인지."
그동안 숱하게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했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도 없는 북녘의 가족 생각에 이 할아버지는 아린 가슴만 안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번 상봉 소식이 꿈만 같다.
"저같이 북한군을 피해 달아난 사람 가족들은 모두 총살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지요. 그때마다 믿지는 않았지만 다 죽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행여나 하는 희망의 끈은 놓지 않고 살아 온 세월이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이 할아버지는 조심스럽다.
"이북과 남한이 정치가 달라서 함부로 말도 못 섞는다고 해요."
이 할아버지는 북녘의 아들을 만나거든 말조심할 생각이다. 혹시 자신과 나눈 대화가 아들, 손자에게 피해가 될까 저어하는 아버지의 마음 때문이다.
북녘에 두고 온 가족들 사진 한 장 없이 기억과 그리움만 오롯이 가슴에 품고 살아 온 이 할아버지. 65년의 기다림이 기적처럼 또 꿈같이 이뤄지는 2015년 가을, 만감이 교차하지만 이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