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와 유아인은 꽤나 닮았다. 늘 자기 의지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어느 순간에서도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는 점이 그렇다.
유아인은 지금 전성기를 맞은 스타다. 그럼에도 단순히 스타라고 하기에는 배우로서의 속성이 뚜렷하다. 그는 세상에 맞설 것만 같은 독특한 분위기로 자신의 입지를 다져 나갔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누구나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에 '왜'라고 되물을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아직도 유아인의 속은 풀리지 않은 채 뜨거운 '화'가 들끓고 있다. 주변 상황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줏대를 갖고 있기에 그는 조금 복잡하고 쉽지 않은 배우다. 유아인과 취재진이 나눈 이야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해봤다.
▶ '베테랑'에 이어 '사도'까지 참 잘됐다.
- '베테랑'부터는 영화 감상을 못하겠더라. 순수하게 감상했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영화 보는 내내 주위 반응을 살피고 둘러봤다. 아무래도 관객들을 향해 영화를 찍기 시작해서인 것 같다. 그 이전까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면 '베테랑'부터는 내가 찾아낸 '나'를 여러분에게 보낸다는 그런 자세다. 황정민 선배가 작품을 고르는 최고의 기준도 '관객'이라고 하더라.
▶ 역사적 인물이고, 복잡한 내면 변화가 있는 사도세자 역할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본인 연기에는 만족했나?
- 만족스러운 부분도 있고, 확실히 아쉬운 부분들도 눈에 많이 띈다. 송강호 선배의 영조 연기를 보면서 내 연기는 연기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배우는 매 순간 치열하게 진심으로 내던지고, 밖에서는 치밀하게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연기라는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거니까 나름대로 진심으로 해왔고, 나만 할 수 있는 연기를 해내야겠다고 애쓰면서 살아왔는데 또 다른 시선들까지도 연기력에 포함된다는 생각을 했다.
▶ 드라마도 그랬지만 유독 사극과 인연이 깊은 것 같다.
- 사극을 워낙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50부작 대하 사극을 방학 때 몰아보고 그랬으니까. 드라마로는 정통 사극을 해보지 못했고, 그 시스템 안에서 충분히 많이 보여드리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있었다. 이준익 감독님의 사극을 하면서 시원했다. 이런 정통 사극, 우직한 돌직구 사극이 있었나 싶었다. 사실 사극에 르네상스가 찾아오고 난 이후부터는 멋부린 이야기 구조에만 치중한 사극들이 많았다. 그런데 '사도'는 배우인 저에게도 진짜 역사극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 점에서 감독님에게 정말 감사하다.
- 사도세자가 허공에 화살을 쏘고 '날아가는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고 이야기한 장면이다. 저는 이 장면이 사도세자의 핵심적인 심리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목적을 가진 화살에 대한 자유로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드시 옳고, 정답이어야만 떳떳한 것은 아니다. 사도세자의 심리는 허공 속으로 자유의지를 갖고 날아가는 화살처럼 살고 싶다는 게 아니었을까. 저 또한 그런 점에 있어서는 사도세자와 닮았다.
▶ 뒤주에 8일 동안 갇힌 사도세자의 심리는 어떻게 연기했나.
- 사도세자는 반성이나 후회는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끝까지 자신의 지조를 지키고 빨리 죽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그 넘나드는 지점에 있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해봤다. 그렇지만 뭐가 어떻다고 감히 말하기가 힘들다. 테스트 촬영을 하면서 뒤주 안에 들어갔던 감각을 잊을 수가 없다. 네모난 작은 틀 안에 웅크려 있는데 공포와 외로움이 엄습하더라. 사도세자와 접신하는 것 같은 그런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순간 진심이라고 하지만 사실 체험하는 거다. 어차피 8일 밤 동안 저는 거기 없었다. 그냥 어떻게 하든지 재연하려고 애써보는 것 뿐이다. 누구도 죽음을 체험할 수는 없는 것이고, 누가 그런 공간에 단 하루라도 갇혀 있는 경험을 했겠나. 저 같으면 혀를 깨물거나 신하가 건네준 부채를 톡 잘라서 할복했을 것 같다.
▶ 영화를 촬영하면서 본인의 부자 관계도 생각해 봤을 것 같다.
- 아버지에 대해 많이 이해하게 됐다. 나이가 드니까 그렇기도 하다. 영조를 봐라. 위대한 대왕이지만 얼마나 빈틈이 많고, 괴팍하냐. 결국 자식은 부모가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그늘이기를 기대하지만 부모 역시 완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을 많이 느껴가는 것 같다. 별거 아닌 기대인데 그게 어긋나고, 그래서 실망하고…. 저 역시 아버지에게 완벽한 아들이 아니다.
- 저는 현장에서 스스로 왕따가 되는 습성이 있다. 붙임성이 없다고 해야 되나. 선배님들과 많은 작품을 함께 해왔고 어릴 때부터 하다보니까 현장에서 나름대로 나를 지키는 법이 있다. 저는 막 섞이는 것보다 조금 떨어져 있는 편이다. 지금은 술도 마시고 잘 지내지만 촬영 당시에는 퇴근 후에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매일 함께 모여서 합숙하고 그런 자리가 있었는데 문근영 씨가 서운해했다. (웃음) 그런데 선배님들이 또 그게 어떤 것인지 모르지 않았고, 가벼운 분들이 없다. (저를) 예쁘게 봐주려고 했다. 송강호 선배님이 말씀하시길 후배가 앞에 있으면 너무 불편할 때가 있다더라. 정말 막상 후배가 앞에 있으면 선배 입장에서는 불편한 점이 있다. 저도 사회 생활하면서 굉장히 그럴 때가 있다. 촬영 끝나고 나서는 시원하게 마시고 있다.
▶ 원래 좀 선배들을 대하기 어려워하는 타입인가 보다.
- 남자 선배들을 대하기 어려워하니까 아예 가까이 가지를 않는다. 20년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차이인지. 우리나라가 미국도 아니고 거리가 있다. 마음과 별개로 선배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하는 예의가 있으니까. 그래도 그 허물은 선배들이 먼저 벗으려고 하는 것 같다. 괜히 담을 쌓은 부분이 있는데 막상 트면 정말 편하다. 파트너로 대등하게 서려면 그런 거리감이 지켜져야 한다. 예를 들어 조태오를 연기하는데 사적인 순간이 개입되는 건, 연기에 있어서 아주 불순물이다.
▶ 여태까지 송강호, 황정민, 김윤석 등 연기파 배우들과 함께 했다. 그들의 경험과 연륜 속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 숲을 바라보는 큰 시각이랄까. 그런 부분들에서 많은 것을 배워가는 것 같다. 사실 한 번에 일취월장하는 건 아니다. 그저 선배들의 태도를 되뇌이고, 또 되뇌이면서 배우는 거지. 예를 들어 황정민 선배가 스태프들과 현장을 아우르면서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배우로서의 소양을 많이 느낀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 것처럼 연기도 훔쳐보고 배우는 거다.
▶ 배우 유아인의 연기는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궁금하다.
- 완전히 새로운 인물을 창조할 수 없고, 그럴 자신도 없다. 인간이라는 게 얼마나 섬세하고 복잡한 존재인데. 결국 나에게서 출발하게 되는 것 같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부터는 좀 더 다채로운 나를 찾고, 키워나가고, 지키면서 살고자 한다. 악한 본성, 추잡한 근성, 선량함, 정의, 순수, 악마성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격과 성분, 성질을 저도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 원래 저는 강박 속에 살았지만 그걸 표출하거나 제 삶에 대단히 녹이면서 살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에 대해, 임팩트를 명확하게 준 적이 없다는 것에 대해 강박이 오더라. 그걸 선택에 녹여 냈던 것이 '베테랑'이나 '밀회' 같은 작품이다. '한 방'을 해보겠다는 것 말고, 선명하게 나라는 사람과 나라는 배우를 보여주고 싶다는 강박이 작용했다. '밀회'가 아주 컸다. '밀회'가 없었다면 '베테랑'도 '사도'도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밀회'는 장르로, 선 굵은 캐릭터로 넘어가는데 거부감이 덜했던 작품이다. '밀회'로 시작해 '베테랑'과 '사도'로 이어졌던 것 같다.
▶ '베테랑' 이후 연기력도 인정받고 대중의 인지도도 높아졌다. 지금까지 쉼없이 달려왔는데 어떤 기분인가.
- 아직도 많이 남았다. 제 안의 화가 풀리지 않고 있다. 진짜로 목이 마르다. 저뿐만이 아니라 배우라는 존재들이 불덩이를 가슴에 품고 산다. 어떤 작품에서도 완전히 풀어놓지 못한다. 끊임없이 갈증을 느끼고 잔여감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게 배우다. 에너지가 아닌 그것을 담는 그릇을 채비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문제는 내 안에서 에너지가 소진되는 게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느냐다.
▶ 유아인 씨가 가지고 있는 반항아 기질이 유효한 것 같다.
- 많이 애를 쓰면서 산다. 짐승남처럼 몸이 좋은 것도 아니고, 인물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뭔가 치명적인척 하는 연기를 하려고 하지 않나. (웃음) 제가 가진 반항아적인 기질을 알아봐 주시는 것 같다. 이념이나 정치색과는 무관하게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왜'라는 의문을 던지는 것. 저라는 사람의 태도 자체가 '왜'로 시작한다. 그것이 기성세대의 반대편에 선 젊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 천만 영화의 배우가 되고, '아인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전성기를 맞았다.
- 물론 부담도 있고, 겁먹기도 했고, 겸손한 자세도 중요하지만 저는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고 가고 싶다. 제가 이상적으로 바라는 건 좋은 일이 있을 때 신나게 즐기고 훌훌 털어버리는 거다. 어릴 때 너무 그걸 못했다. 순간 날 찾아오는 것에 흠뻑 빠진 적이 없었다. 이건 날아가 버리는 거고, 영원한 게 아니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결국 흠뻑 취할 수가 없다는 거다. 어깨에 벽돌도 좀 올렸다가 내려놓으면 되니까. 아등바등 겸양떠는 것보다도 시원하게 즐기고, 지금이 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면 전략적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나중에 꼰대가 되어서 '왕년에 이렇게 좋은 날이 있었다'고 회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