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조선왕조실록] 시해당한 명성황후가 폐서인되다

음력 8월 22일

조선왕조실록, 오늘은 일본 자객들의 손에 살해된 명성황후가 도망친 것으로 알려져 서인으로 강등됐던 이야기를 전합니다.


1895년(고종 32) 음력 8월 20일에 명성황후가 대궐안에서 무참히 살해당한 뒤 시신이 불태워지는 을미사변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이틀뒤에 명의로 '왕후'를 서인으로 폐위한다는 조서가 내려졌는데, 이는 김홍집 등이 고종의 명의를 도용해 만든 가짜 조서인 것으로 후일 알려졌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조선의 권력이 친일 내각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인데, 조서 내용을 보면 당시 친일파들이 얼마나 명성황후를 증오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서에는 "왕후 민씨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고종 주위에 배치하고 왕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착취하고 벼슬을 팔아 탐욕을 부려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났다"고 적혀있습니다. 당시 어지러운 정세의 책임을 명성황후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또 "민씨가 군사를 해산한다고 왕의 명령을 위조해 변란을 격발시켰고, 사변이 터지자 도망가서 찾아도 나타나지 않는다며 이는 왕후의 작위와 덕에 타당하지 않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일본에 무참히 살해된 후 시신까지 훼손당했음에도 변란의 원인을 제공한 뒤 도주했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워 폐서인의 수모를 안긴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약 50일 후인 음력 10월 10일에 고종은 명성황후를 다시 왕후로 복권시켰습니다.

■ 정조 원년 (1776) :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이 역적 홍봉한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
⇒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이 정조 즉위 이후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며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 정조 17년 (1793) : 성균관 장의 후보 정원을 20명으로 정하다
⇒ 성균관의 대표자인 장의 후보에 180여 명이 천거 되자 후보자를 20명으로 제한해 훌륭한 대표를 뽑도록 했다

■ 고종 14년 (1877) : 기근 구제비 1만 냥을 낸 광주부 이택규에게 6품직을 주다

■ 고종 32년 (1895) :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강등시키다

도움말 : 김덕수 (통일농수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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