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같은 감성의 민중시인 문병란 잠들다

80년대 인기를 끌었던 민중가요 '직녀에게'의 가사가 된 원작시의 저자 문병란 시인이 향년 80세로 타계했다.

김원중의 노래로 불리워진 '직녀에게'는 서정적 감성으로 남북 분단의 아픔과 통일에의 염원을 담아 청년 학생들과 대중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로 끝난다.

1970년대 중반에 발표한 이 시는 자타가 공인하는 문 시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그의 시세계는 생활감정의 승화와 서정을 노래하는 면, 의식의 내면을 탐구하는 면과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을 나타내는 면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꽃에게>

(중략)
오늘의 수치,
백주(白晝)의 무법(無法) 앞에
알몸으로 떨고 있는 꽃이여,

아슬아슬한 빛의 난간에서
네가 마지막 지킨
분노,
어느 절정에 눈을 꼭 감고 있느냐.

이제 지켜야 할 아무것도 없는
적나라(赤裸裸)한 가슴,
차라리
찬란한 밝음을 갈갈이 찢어버려라.

이 시는 1970년 9월에 간행된 제 1시집 <문병란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4.19혁명은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한 줄기 소나기 같이 산 넘어 가버리고’ 그 민주적 소망을 총칼로 엎고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일군의 군인정치가들에 의하여 5.16 군사쿠데타로 유린당한 당시의 상황, 장차 10월 유신 선포 전야에 감히 일개 교사였던 나는 조선대학교 전임강사시절 겁도 없이 反유신 反군사정치 입장에 서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저항시를 시도하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따져놓고 보면 질 줄을 알고 적나라한 맨몸둥이로 도전을 감행한 당시의 순수한 나의 선언을 담고 있음을 본다. ‘찬란한 밝음을 갈갈이 찢어버려라’ 순진무구하나 얼마나 당당한 맨주먹의 선언인가. 그리고 무모하기 그지없는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새끼들에게>는 문 시인이 5.18 항쟁 이후 폭도로 몰려 고통 받던 시절 그 울분의 시대적 아픔과 저항의지를 담아 노래하고 있다.

<연가 5
-새끼들에게>

(중략)

오늘 이 땅에는
남의 총 남의 깃발이 길을 막는데
팝송을 들으며
코카콜라를 마시며
코밑이 까칠해지는 아들아
아무리 달콤하게 속삭일지라도
아무리 술술 잘 넘어갈지라도
애들아, 너희는 구정물통에 뜬
기름진 선진국의 기름덩어리.
먹고 남아 돌아가는 버터에 길들은
할렘가의 검둥이가 되지 말아라
국적 모를 洋돼지가 되지 말아라
나의 아들 딸들아!

아래 시 <꽃가게 앞을 지나며>는 밝고 아름다운 연가풍의 시이다.

(중략)
오라, 노을 지는 꽃길 위에
종종 걸음으로 왔다가 스러지는
무수한 발자국 지우며
봄과 함께 꽃내음 타고 올
제비꽃 초롱 내 사랑하는 연인아!

작가는 이 시에 대해 "반드시 심오한 뜻이나 난해한 메타포가 아니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한 송이 꽃이라도 사고 싶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살맛나는 곳이냐. 모든 선한 연인들의 고운 눈빛을 생각하며 쓴 시"라고 설명했다

블로그 <나의 시세계와 작품 -문병란(유미숙 http://blog.daum.net/you224/2875257)>에서는 문병란 시인의 초기에 후기까지 주요 시와 문 시인이 직접 쓴 해설을 싣고 있다.

문병란 시인은 문인으로서 활동 뿐만 아니라 민주화 투쟁을 위해 단체활동과 대중강연에 적극 나섰고, 자신이 몸담고 있던 조선대학교의 학원자유화 투쟁을 위해 전면에 나섰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꽃같은 감성에 대쪽같은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준 고인의 발자취는 후대의 가슴에 길이 빛나리라.

고인의 빈소는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돼 오는 29일 발인하며,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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