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한 시골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1980년대 초반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친척 가운데 한 분이 오랜만에 귀국해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말을 들을 때는 "한국에서 가난하게 사신 분이라 미국 정착생활에 대한 미화가 심하다"고만 생각했었죠.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 3년을 살아본 결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도 내가 아는 미국인들은 한국인에 비해 운동화 교체주기가 매우 짧았습니다. 운동화 값이 싸도 너무 싸기 때문이죠. 한국이라면 세일을 해도 족히 10만원이 넘었을 나이키 러닝화가 미국의 나이키 아울렛 매장에서는 5,60달러 밖에 하지 않습니다. 3,40달러 하는 메이커 운동화도 넘쳐 흐르니 운동화를 반복해서 빨아 신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사정이 이러니 한국 주부들이 미국여행만 갔다 하면 온 식구들이 3년 동안 신을 신발을 트렁크 하나 가득 사올 수 밖에 없습니다.
신발 뿐이겠습니까? 미국은 모든 것(물건)이 흔합니다. 값도 쌉니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만들어 팔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소하지만 소비자가 아쉬워하는 물건(예를 들어 전기 스탠드를 책상에 고정시키는 C클램프의 부품 가운데 하나인 나비형 볼트 등)도 종류별로 갖춰 놓고 저렴하게 팝니다.
이러니 미국은 '소비천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인들이 돈을 펑펑 쓴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합리적인 소비의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합리적 소비성향이 일시에 무너지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블랙프라이데이'입니다. 추수감사절 바로 다음날인 11월 넷째주 금요일인 이날은 미국 전역의 소매업체들이 새벽부터 문을 열고 손님을 받습니다. 월마트는 물론 제이씨페니,콜스,메이시스(이상 생활형 백화점)와 베스트바이(가전 양판점), 토이저러스(완구점), 심지어 한국으로 치면 '전파사'로 볼 수 있는 '라디오 셱'까지 블랙프라이데이 영업을 벌입니다. 할인율도 대단합니다. 원래 가격의 50% 이상을 할인해주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특히 특정 미끼상품은 한정된 시간 안에서는 거의 거저일 정돕니다. 이런 물건이 나오면 고객들은 백화점이 개점하기를 기다렸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매장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하죠. 그래서 이런 세일을 '도어버스터'세일 (door buster:문짝이 터져 나갈 정도의 세일)이라고도 합니다.
영상으로나마 지난해 미국 ABC방송의 블랙프라이데이 진풍경을 보시죠.
블랙프라이데이는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세일을 시작하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블랙프라이데이에서 크리스마스까지 한달 정도의 기간이 미국 최대의 세일기간인데요. 그래서 블랙프라이데이라는 이름도 '적자'(赤字)에서 '흑자'(黑字)로 돌아서는 때라는 의미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처럼 블랙프라이데이 매출이 크게 늘어나자 2011년 이후 각 업체들이 문 여는 시간을 점점 앞당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침 8시에 열던 것을 새벽 6시, 4시로 앞당기더니 새벽 0시까지 등장했죠. 한 술 더 떠서 아예 목요일 저녁에 문을 여는 '미리' 블랙프라이데이 세일까지 생겨났습니다. 업체는 돈을 벌겠지만 노동자들은 명절을 쉬지도 못하고 출근해야 하는거죠. 그래서 미국에서는 요즘 '그레이 서즈데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블랙프라이데이 이후의 월요일은 '사이버 먼데이'라고 또 세일을 합니다. 블랙프라이데이 때 남은 상품을 할인된 가격에 온라인 판매를 하는 겁니다. 요즘은 블랙프라이데이 세일보다 사이버 먼데이 세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국도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을 한다고 합니다. 다음달 1일부터 2주일에 걸쳐 세일을 한다고 하는데요. 이상한 것은 이 세일을 한다고 밝힌 주체가 '정부'라는 점입니다. 정부가 개별기업의 세일 시기를 정해주는 것도 이상하고 거기에 동참하는 기업도 이상합니다. 정부의 '보이는 손'이 '기업의 팔'을 비튼 결과일까요?
하지만 경위야 어떻든 세일을 한다고 하니 일단 소비자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합니다. 쥐꼬리 월급에 그동안 억눌렸던 쇼핑 욕구를 이번 기회에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죠. 얼마나 좋은 물건을, 얼마나 싸게 팔지 두 눈 부릅뜨고 봐야 겠습니다.
P.S: 미국에서 블랙프라이데이 세일 때 대형 LCD TV를 1,100달러(한화 120만원 상당)에 샀었죠.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똑같은 제품을 보니 300만원 가까이 됐습니다.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스티커 쇼크'(sticker shock)를 제대로 경험한거죠. 그 TV는 삼성TV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