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령 탈북자 '강씨 연대기'…굴곡진 역사 타넘은 '모정'

신간 '나의 살던 고향은'…해방 뒤 전쟁·분단 속 개인의 아픔 오롯이 증언

나이 일흔다섯이던 2006년 탈북한 강순교 씨(사진=도서출판 행복에너지 제공)
거대한 역사의 파고를 타넘어 온 개인의 삶이 주는 여운은 언제나 강렬하다. 그 미시사 안에 현재의 우리네가 놓치고 사는 수많은 가치들이 오롯이 녹아 있는 까닭이다.

여기 피와 땀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한 사람이 있다.

'제 이름은 강순교입니다. 저는 여든네 살의 할머니입니다. 북조선에서 탈출하여 중국에서 숨어 살던 저는 2006년에 한국에 왔습니다. 일흔다섯 살 때였습니다.'

신간 '나의 살던 고향은'(지은이 강순교·출판사 행복에너지)에서 '연어의 꿈'이라는 제목을 단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된다.

최고령 탈북자로 알려진 강순교 씨는 남측으로 온 이유에 대해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죽기 전에 어릴 적 바라보았던 새파란 고향 하늘을 다시 한 번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단 한 번도 사람답게 살지 못했으나 죽음만은 적어도 사람답게 맞이하고 싶어서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유나 희망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제 자식들에게 그 말을 마음껏 들려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32년 경북 봉화군 법전리에서 태어난 강 씨는, 열두 살 되던 해인 1944년 부모와 함께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으로 이주해 농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곳에서 조국 해방을 맞이한 그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한다.

'조선인 부락의 어른들은 목놓아 울고 외쳤지만 기쁨도 잠시, 저마다의 생각에 모두 다 침울해 했습니다. 이미 간도에 정착했기에 조선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이 간도에서 정착해 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땅 하나 가져보지 못했던 고향보다는 새로운 것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이곳이 어쩌면 자식들을 위해서도 더 좋다고 애써 생각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생각을 같이하신 어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 놓고 고향 산천의 하늘을 향해 처량하게 아리랑을 부르셨습니다.' (46, 47쪽)

그렇게 해방 뒤 중국 땅에 남은 강 씨는 1950년 중국 내전 당시 공산당 팔로군의 간호사로 근무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전쟁에도 참전해 중공군과 북조선뿐 아니라 포로로 잡혀 온 남한 군인들의 부상도 치료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그곳에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했습니다. 대놓고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북조선이든 남한이든 조선인 출신 군인들이면 동포라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붕대도 꼼꼼하게 감았고, 약도 더 챙겨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전장의 모습은 어김없이 잔인했습니다. 아직 앳된 남한 병사가 죽어가며 어머니를 부르던 모습을 저린 가슴으로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53쪽)


◇ "이렇게 분단이 오래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ㅣ강순교ㅣ행복에너지
한국전쟁이 휴전한 1954년 군을 제대한 강 씨는 중국에서 조선인 서찬선 씨와 결혼해 자식들을 낳았다.

강 씨 부부는 이국땅에서 사는 외로움과 소외감을 자식들에게 물려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조국은 전쟁 뒤 휴전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저와 남편의 고향이 있는 남한과 중국은 국교가 단절 되어서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행히도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용이 되는 상태였습니다. (중략) 어찌 됐든 북조선이라도 우리 조선 땅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북조선에 가면 곧 통일이 될 것이고 그때 고향으로 가도 충분하다고 믿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분단이 오래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57, 58쪽)

1963년 북측 원산으로 이주한 강 씨 가족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남측 출신이라는 이유로 갖은 박해를 받았던 탓이란다. 1987년 남편을 먼저 보낸 그는 1998년 굶주림과 질병으로 큰아들까지 잃고 말았다. 생계를 유지하려 중국을 넘나들며 경제활동을 하던 강 씨는 노동교화소에 수감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1990년대 말부터 북조선 사람들 중에 일부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중국으로 가려고 국영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사상이나 이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밥 때문이었습니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고, 결국 남한으로 들어간 북조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나라로 가 버린 민족의 배신자들에 대한 비난의 강도는 강했습니다. 침을 뱉고 손가락질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욕설은 조용해지기 시작했고, 손가락질의 힘도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116, 117쪽)

강 씨는 급기야 2004년 탈북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완전히 이탈했다. 그리고 자식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입국했다. 이 책은 남측으로 오는 길에 강 씨 가족이 겪었던 극심한 고초를 전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를 이겨낼 수 있던 힘은 '모정'으로 귀결되는 모습이다.

'새끼들 입에 뭐라도 들어가는 것을 보니까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습니다. 순간 제 뱃속에서도 꾸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사실은 아이들을 주려고 저는 한 입도 대지 않았던 터라 목울대로 침이 꿀꺽꿀꺽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중략) 이 세상에 제일 강한 존재는 어머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독해질 수 있는 존재는 자식 잃은 어머니일 것입니다. 중국에 나갈 때마다 다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변명을 하면서 조국과 당에 죄책감을 느꼈던 태도들을 모조리 버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91, 192쪽)

강 씨는 현재 경기 이천시에 살고 있다. 하지만 북에 남겨두고 온 나머지 가족들에 대한 걱정 탓에 여생이 행복할 수만은 없으리라. 그 뼈저린 아픔을 잘 아는 그가 우리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제가 제 자식들과 손주들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저리게 걱정하는 것처럼 어머니의 마음으로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중국의 국경을 넘는 가난하고 불쌍한 북조선 사람들을, 너무도 낯선 한국의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탈북자를, 북조선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싸게, 함부로 팔려 가는 여인들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탈북자의 아이라는 이유로 영문도 모르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중국에 사는, 비록 반쪽짜리라도 엄연히 조선의 아이들인 그 아이들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214,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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