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위는 "129년 전인 1886년 한국에 온 헐버트가 우리 소리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구전으로 전해지던 아리랑 가락을 서양식 음계로 채보해 우리 음악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 ‘서울아리랑상’의 제정 취지에 잘 부합해 첫 수상자로 합의 추대했다"고 밝혔다.
미국 명문 다트머스대 출신인 헐버트는 구한말 고종이 육영학교를 설립한 후 미국에 요청해 1886년 한국에 온 교육자 겸 선교사이다.
그는 1896년 영문잡지 'Korean Repository' 2월호에 논문 'Korean Vocal Music' 발표를 통해 한국의 고전음악과 대중음악 등을 분석하면서 서양식 음계로 채보한 ‘아리랑’을 비중있게 다뤄 전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 논문에서 “대략 782마디 정도 되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은 존재다. 다른 노래들은 말하자면 반찬에 불과하다”라고 한국 음악 중 아리랑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헐버트는 아리랑뿐 아니라 시조, 민요들도 악보와 함께 다수 소개했고, 이후 아리랑과 한국 민요 악보집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헐버트는 논문에 앞서 한국에 처음 온 1886년 10월17일, 미국에 있는 누이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옆집 꼬마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을 오선보를 직접 그려 옮기고, 가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도 써넣었다.
이 편지는 천안독립기념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만 보관되어 있을 뿐 친필편지 원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조직위원인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선생 등의 노력으로 최근 서울 소재 대학교에 친필편지 원본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헐버트가 생전에 쓴 편지 400여통과 함께 2개의 박스에 담겨 있는 이 원본의 존재를 편지 분류 작업을 통해 확인하게 되면 근대문화유물로 지정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헐버트는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맞춤법, 띄어쓰기, 점찍기 등을 도입했고,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만드는 등 교육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도산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1949년 별세 당시 국내 최초로 외국인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이듬해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한글연구와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온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