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1. 국민연금, 재벌개혁의 덫인가? 2. 국민연금은 거대한 사기인가? 3. ‘연못 속의 고래’가 된 국민연금의 운명은? |
먼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정에서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합병성사의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다.
국민연금이 결국 찬성 쪽으로 손을 들어줘 헤지펀드 엘리엇과 일부 주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병이 성사됐다.
롯데그룹은 형제 난으로 4백개가 넘는 복잡한 순환출자고리 등 후진적인 지배구조의 실상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롯데푸드 등 롯데그룹 4개 계열사의 최대주주나 주요주주인 사실이 부각되면서 국민연금에 주주권을 제대로 행사해 후진적인 지배구조를 바로잡으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국민연금이 최대주주나 주요주주인 기업은 삼성과 롯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13년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5%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상장기업의 숫자는 260군데에 이른다.
이 가운데 삼성전자를 비롯한 상당수 기업에서 국민연금이 최대주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30대 재벌그룹으로 국한시키면 국민연금이 지분을 갖고 있는 상장사 3곳 가운데 2곳에서 국민연금이 그룹총수 일가보다 더 많은 지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연금기금의 규모는 현재 5백조에서 2043년에는 2천 5백조까지 증가할 것으로 추산되는데 앞으로 국민연금기금의 국내 주식투자 비중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기금의 상장기업에 대한 지분율은 더욱 높아져 국민연금이 거의 모든 상장 기업을 지배하는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다.
이번 롯데그룹 사태에서 보듯이 재벌개혁의 필요성이 거론될 때마다 국민연금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삼성물산 합병건, 관례 무시하고 전문위원회 거치치 않아"
국민연금은 지금까지 이런 기대에 부응해 주주권을 제대로 행사해 왔다고 볼 수 있는가.
물론 현실적인 한계가 있겠지만 높은 점수를 받기는 힘들다는 평가다.
국민연금은 주주권을 주주총회 때의 의결권으로 국한시키고 의결권 행사를 위해 행사의 원칙과 기준, 방법, 절차 등을 정한 의결권 행사지침을 지난 2006년부터 마련해 시행해 오고 있다.
지침에는 장기적인 주주가치 증대에 기여하는 방향에서 환경과 사회, 기업지배구조 책임투자요소까지 고려해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그럴싸하게 포장돼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일 뿐 실제 시행으로 연결되는 것과는 별개다.
단적인 예가 지난 6월 ㈜SK와 SK C&C합병과정에서는 의결권 행사에 앞서 행사지침 8조 2항에 따라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의 결정을 물었지만 불과 한달 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정에서는 묻지 않았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절차를 거칠 수도 있고 안거칠 수도 있다면 의결권 행사지침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고 만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민연금이 그동안 의결권 행사지침에 따라 의결권 행사를 비교적 잘해 오고 있었는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으로 그 동안의 좋은 평가를 다 날려버리고 말았다”며 “이 합병 건에 대해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의 결정을 물어보지 않은 것은 그 동안의 관례를 다 무시한 돌발적인 의사결정”이라고 비판했다.
◇ 주주권 제대로 행사하지 않는 것은 선량한 수탁자 의무 저버린 것"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제대로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거대한 공적 기금인 만큼 헤지펀드처럼 수익만을 좇아 물불을 안 가리고 달려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뒤로 빠져 거수기 역할만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연금으로서는 2천만명이 넘는 연금 가입자의 노후가 달려있는 자산을 관리하는 만큼 투자한 기업이 건강하게 잘 경영되고 수익을 내고 있는지를 항상 들여다 보고 잘못 가고 있을 때는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수탁자로서 기본적인 의무이기도 하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배임이다. 대주주로서 주주가치가 하락할 것이 명백하게 보이는데도 반대하지 않는 것은 선량한 수탁자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무는 국민연금이 주요주주로 있는 재벌기업에 대해서도 똑같이 행사돼야 한다..
김우찬 교수는 “재벌들의 내부거래나 사익편취로 회사가치가 파괴되고 있는데도 국민연금이 가만히 있다는 것은 가입자인 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 된다”고 강조했다.
국민연금의 이러한 주주권 행사는 재벌그룹 지배구조개선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기관투자자 가운데 재벌그룹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투자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삼성물산 합병건에 대해 반대목소리를 냈던 기관투자자가 전무했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 만큼 다른 기관투자자와 비교해 힘과 지분은 월등하고 이해상충에서는 문제가 적은 국민연금에 대한 기대가 큰 실정이다.
◇ "재벌개혁은 국민연금 활동의 외부효과"
그렇다고 국민연금이 본격적으로 재벌개혁을 목표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생활을 안정되게 하기 위한 것이지 재벌개혁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재우 연구위원은 “흔히 코리아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후진적인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에 국민연금을 동원하겠다고 접근하는 것은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국민연금이 장기적인 수익률 개선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게 되면 외부효과로 기업 지배구조가 개선될 수도 있지만 낙후된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목적이 돼서는 안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김우찬교수도 주주권 행사와 관련해 “기업경영에 개입하거나 좌지우지하는 것은 국민연금이 할 수 없다. 누가 보더라도 문제가 되는 의사결정을 했을 때 국민연금이 반대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지배구조개선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교수는 “국민연금의 1차 목표는 위험이 조정된 수익률의 극대화이고 거기에 재벌지배구조가 방해가 된다면 방해물을 제거하기 위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히려 국민연금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설 때 남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국민연금이 함부로 주주권을 휘두르게 되면 이 땅에서 살아남을 기업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장기적인 수익률제고 관점에서 투명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일관성있게 이뤄지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반대하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국민연금의 기업지분 확대를 아예제한하자는 주장도 있다.
김우찬 교수는 “국민연금의 기업 지분이 지금보다 높아지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고 본다”며 “국민연금 지분이 기업 총수의 내부지분보다 더 많아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 국민연금이 기업 지분을 10% 이상 갖지 못하도록 법제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 캘퍼스(CalPERS), 지배구조 문제 기업 리스트도 공개
주주권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수익률 제고를 위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해외 연기금이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세계 주요 연기금 가운데 미국과 캐나다, 네덜란드, 노르웨이의 연기금은 주주총회 의결권 행사에 그치지 않고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주주소송과 입법운동, 투자자 연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CalPERS, 캘퍼스)의 경우에는 기업 지배구조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실적이 나쁜 기업에 대해서는 리스트를 작성해 공개한다.
캘퍼스가 리스트를 공개할 때면 해당 기업의 주가가 크게 움직여 ‘캘퍼스 효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국민연금도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보다 적극적으로 주주권 행사에 나설 필요가 있다.
김우찬 교수는 “국민연금이 주주권에서 가장 소극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주주권 행사인 의결권 행사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앞으로 의결권 행사 외에도 주주제안, 사외이사후보와 감사후보 추천, 정관개정 요구 등으로 주주권 행사를 점차 넓혀가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 "'이사자리 내놔라' 기업경영 간섭은 곤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주주권이나 의결권행사를 아예 공적인 기금의 성격에 걸맞게 보수적으로 행사하는데 그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주식투자자 입장에서 잘못된 경영행위로 인한 주식가치 하락을 막겠다는 선에서만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김용하 순천향대 금융보험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이 이사장이나 회장을 뽑는데 관여하는 등 기업경영에 대해 간섭해서는 안 된다. 기업에 ‘이사자리 내놔라’고 요구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며 “기업이 국민경제 이익에 반해서 행동한다든가, 헤지펀드가 들어와서 적대적 인수합병을 하려고 할 때에 한해서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이 주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주주권 행사 자체가 아니라 수익을 위해 경영에까지 참여하려는 적극적인 행동주의다.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헤지펀드처럼 적극적인 행동주의에 나서는 것은 기금의 규모가 작다면 모르지만 국민연금 기금과 같은 거대 규모의 기금, 그것도 장기적인 수익을 보고 움직이는 공적 기금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연못 속의 고래’로 비유되는 국민연금기금이 먹잇감을 찾는다며 요동을 치면 그 연못은 진흙탕이 되고 다른 물고기가 함께 살아가기가 힘든 환경이 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