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관찰하는 게 나쁜 버릇일 수도 있지만 너무 흥미로워요. 영화 오피스를 만나기 전에 현실에서 미례 같은 인물을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저런 캐릭터를 연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뤄진 셈이죠. 조직 생활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폭력을 끄집어내는 게 옳다고 느낀 점도 컸어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이뤄지는 폭력 말이죠."
영화 개봉에 앞서 최근 서울 삼청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고아성은 "이런 식으로 현실에서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는 인물이 10명은 넘는다"고 했다. "그들을 작품 속 캐릭터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이 비범한 젊은 배우의 바람이다.
"10명 중 다소 주책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인물이 있는데, 가장 먼저 연기로 표현해 보고 싶은 캐릭터죠. 어떤 장르, 상황에 대입될지는 모르지만요. 뭔가를 의도하고 일을 하면 금방 질리는 것 같아요. 의식적으로 의미를 생각하다보면 갇히게 되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작품을 선택할 때도 하고 싶은 것을 해요. 그리고나서 나중에 생각해 보면 항상 나름의 의미가 있었어요. 이번 오피스도 그랬죠."
▶ 오피스에 왜 끌렸나.
= 전작 '우아한 거짓말'(2014)이 개봉했을 때 오피스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설국열차'(2013)를 마친 뒤 따뜻하고 인간적인 영화가 하고 싶어서 우아한 거짓말을 택했고, 다음 작품에서는 발산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오피스를 하게 됐다. 패턴이다. 촬영하면서는 극 말미 미례가 돌변하는 시점에서 연기에 이야기가 희생될까봐, 배우로서 너무 큰 혜택을 받는 것 같아 감독님께 "미례의 그런 모습을 안 보여 주면 어떨까"라고 말씀 드렸는데 "안 된다"고 하시더라. 결과적으로 제 생각도 많이 바뀐 측면이 있기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나온 것 같다.
= 현재 촬영 중인 '오빠 생각'의 이안 감독님과 우아한 거짓말을 찍을 때였다. "이러한 부분은 좀 감추고 가는 게 좋지 않냐"고 말씀 드렸는데, 감독님이 "모든 세대가 볼 수 있는 영화를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 '내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만 찍고자 했던 건 아닌가'라는 생각에 민망해지더라. 좀 더 대중적으로 열리게 된 계기였다.
▶ 미례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방점을 뒀던 부분은.
= 착하고 답답한 인간상. 극중 미례는 작은 일을 하나 하는데도 온 힘을 다한다. 스템플러 하나 찍는데도 말이다. '차라리 성격이 못되기라도 했으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답답한 인물이다. 그러한 답답함에 그녀가 더욱 애잔했다. 성실한 것 밖에는 내세울 것이 없는 미례. 오로지 제 시선만 내세워 자존감을 지키려 했던 저 역시 그랬던 것 같더라. 미례에게 제 모습이 있었다. 준비하면서 설정도 많이 만들었다. 전작들에서는 안 그랬는데, 이번에는 시나리오에 필기도 많이 했다.
▶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작품을 주로 해 왔다. 의식적인 선택이었나.
= 의식하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랬더라. '내가 그런 이야기에 끌렸나보다'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러한 소재의 영화가 재밌다. 제가 너무 독특한 작품에 끌려다니는 건 아닌가라는 마음에 다음 영화로 오빠 생각을 선택한 면도 있다. 새로운 기회로 여기고 있다. 초등학교 2, 3학년 되는 아이들과 촬영을 하면서 좋은 기운을 얻고 있다. (웃음)
▶ 미례 캐릭터에는 원혼과 같은 한국적인 공포가 배어 있는 듯하다.
= 연기하면서도 영화 초반 가족을 살해하는 김병국 과장(배성우)의 분신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을 만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다 보면 동실시하게 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미례에게는 그 사람이 김병국 과장으로 다가왔다.
= 캐릭터와 동일시하려 노력한다. 헤어지는 방법은 작품마다 다르다. 우아한 거짓말 때는 굉장히 오래 갔다. 개봉하고 나서도 계속 생각나고, 슬픔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오피스 때는 빨리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에 끝나자마자 여행을 갔다. 저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 실제 비정규직 노동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던데.
= 처음에 시나리오만 읽었을 때는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준비를 하면서 재정비해 보니 충분히 현실적인 이야기더라. 누군가 제게 분노를 심어 주는 사건들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스트레스가 어떻게 표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직장 상사를 죽이고 싶다는 상상을 하루에 세 번만 해도 일년이면 얼마인가. 그런데 막상 원하는 대로 살인이 이뤄지면 성취감이 없다는 연구도 접했다. 그런 점에서 절대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배우 아닌 다른 일을 할 생각도 있는지.
= 배우로 평생을 살고 싶다. 연출에 대한 생각도 없다. 사회학 공부는 재밌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피스를 준비하면서도 공부할 때 눈길을 끈 '파팽 자매 살인사건'(1933년 프랑스의 한 시골마을에서 하녀로 일하던 파팽 자매가 주인 모녀를 엽기적으로 살해한 사건. 자매는 경찰에 체포될 당시 침대에 나란히 잠들어 있었고,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이 겹쳐졌다.
인문학자·심리학자 등의 커다란 연구 대상이 된 이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적대시하는 사람을 막상 죽이더라도 쾌감이나 감응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준비하면서 공부한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큰 도움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