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은 지난 22일부터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고위급접촉 결과를 토대로 모두 6개항에 이르는 공동합의문을 발표했다.
합의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북측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 지역에서 발생한 지뢰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제2항)한 것이다.
이는 ‘주어(주체)를 특정한 사과’가 돼야 한다는 우리 측 입장이 충분히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북측이라는 주어가 들어있고 사건 내용에 대해선 ‘지뢰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이라고 명시했다.
지난 2002년 제2연평해전 이후 북측이 “서해상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무력충돌 사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한 것과 비교하면 크게 진일보한 내용이다.
비록 ‘사과’ 대신 ‘유감’이란 표현이 사용됐지만 이 정도의 문구라면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4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밝힌 수준에 거의 근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이 정전협정 이후 400~500차례에 이르는 대남도발 가운데 확실하게 사과를 표명한 것은 1968년 1.21 청와대 기습사건 뿐이다.
그나마 이 조차도 발생 4년여 뒤인 1972년 5월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에 밀파됐을 때 간접적으로 이뤄졌다.
이런 점에서 이번 북한의 ‘직접 사과’는 남북 분단 70년사의 이례적인 일이자, ‘도발→위협→보상’이란 악순환 고리를 끊는 계기가 된다.
우리 측이 요구했던 ‘재발 방지 약속’도 표현을 달리 했을 뿐 내용상으로는 포함됐다.
합의문 3항은 “남측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모든 확성기 방송을 8월25일 12시부터 중단하기로 하였다”고 기술했다.
이 가운데 ‘비정상적인 사태’는 북측의 도발 등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란 설명이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은 “재발 방지와 연계를 시켜서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을 붙임으로써 여러 가지 함축성 있는 목표 달성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과정에서 (협상)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리 측은 북측의 이 같은 양보에 대해 대북 확성기 방송을 25일 정오부터 중단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보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북측은 오히려 준전시 상태 해제(제4항)와 추석을 계기로 한 이산가족 상봉(제5항) 등 우리 측 요구안을 추가 수용했다.
이 밖에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당국회담 개최(제1항)와 다양한 분야의 민간교류 활성화(제6항)는 남북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남측의 기본적 대북정책이 반영된 것이다.
이번 고위급접촉은 가히 ‘체력전’이라고 부를 만한 밤샘 마라톤협상에서도 우리 측이 끈질기게 일관된 원칙론을 관철시킨 개가로 평가된다.
협상이 장기화되면서 비관적 전망이 짙어지던 24일 오전 박 대통령은 “사과와 재발 방지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며 대북 원칙론을 강조했다.
사실상 북측의 ‘백기투항’을 압박함으로써 협상 결렬이 우려되는 순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북측은 판을 깨지 않았다. 남북이 함께 ‘신의 한 수’를 둔 셈이다.
북측은 이번 지뢰도발로 인한 무력 충돌 사태를 풀기 위해 김양건 노동당 비서 명의의 서한을 먼저 보내면서 이전과는 현격히 다른 행보를 보였다.
협상 과정에서도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는 식의 기존의 ‘벼랑 끝 전술’을 버리고 끝까지 대화의 끈을 놓지 않는 진정성 있는 태도로 이번엔 뭔가 다를 것이란 기대감을 낳았다.
결국 남북간 전력이 총동원되다시피 하며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던 지뢰도발 및 포격도발 사태는 오히려 극적 반전을 통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다만 남북관계가 그간의 험로를 이제 겨우 벗어나기 시작한 만큼 방심과 낙관을 절대 금물이며 신뢰 구축을 위한 차분한 대응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