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시모노세키 회담에서 청나라는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인정했다. 한반도에 대한 오래된 종주국의 지위를 포기한 것이다.
일본은 이 회담에서 요동반도와 타이완, 펑후열도를 전리품으로 챙기고, 2억 냥의 전쟁배상금을 받아냈다. 한반도 전체는 물론,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만든 것이다.
이 회담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는 희희낙낙하며 "국운이 뻗고 나라의 위광을 드러내는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사건"이라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환희의 순간은 너무 짧았다.
먼저 청나라 곳곳에서 반일 시위가 벌어졌다. 이 항쟁은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수립, 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중국대륙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서구열강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만주와 한반도 진출을 서두르고 있던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등에 업고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라고 협박했다.
세 나라에 대항할 힘이 없던 일본은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요동반도를 토해냈다. 이른바 '1895년의 3국 간섭'이다.
1896년 6월 3일 청나라와 러시아는 '노청비밀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청나라는 전시에 모든 항만을 러시아 군함에 개방하고, 만주의 흑룡강성과 길림성을 횡단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철도를 까는데 동의했다. 이 철도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될 예정이었다.
이것도 모자라 러시아는 요동반도의 요충지인 여순(뤼순)과 대련(다롄)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청나라가 이렇게 양보한 것은 러시아보다 일본의 야욕이 더 무섭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했다.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더 위험한 적인 일본을 견제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일본이 가까스로 확보했던 조선에서의 우월권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 일본의 어이없는 제안 “38도선을 경계로 조선을 나눠갖자”
1896년 5월 26일에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이 대관식에 참가한 일본의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러시아 외상 로마노프에게 은밀한 제안을 했다.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의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이 나눠 가집시다."
이 제안은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고종이 자국의 공사관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굳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이유가 없었다. 러시아는 만주에 이어 한반도 전체를 영향권 아래 둘 생각이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심하고 군비 확충을 서둘렀다. 전쟁 비용만 15억 엔을 책정했다. 이는 2억 3,000만 엔 정도였던 1년 예산의 7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전황은 일본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유리하게 풀려나갔다. 5월에는 일본 육군의 제1군이 압록강을 넘어 쥬렌청을 점령하고, 제2군이 요동반도에 상륙을 개시해 다음해 1월에는 여순을, 3월에는 봉천을 점령했다. 5월에는 쓰시마 해협에서 무적의 발틱함대를 수장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황은 일본에게 불리하게 전개됐다. 뒤늦게 러시아가 막대한 병력과 전쟁물자를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해 나르기 시작했다. 당황한 일본은 미국에 거중조정(居中調停)을 요청했다. 결국 1905년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10년 전의 시모노세키 조약과 달리 일본은 충분한 전리품을 확보하지 못했다.
청나라와 달리 러시아는 전쟁배상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 러시아는 몇 개 전투에서 지기는 했지만, 전쟁에서 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은 한반도와 남만주를 보호령으로 획득하고, 사할린 남부를 차지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러시아가 서둘러 전쟁을 종결하고 이렇게 영토를 양보한 것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의 도화선이 된 1905년 1월 9일의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는 민중 봉기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러일전쟁이 종결되자 러시아 대신 일본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했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한반도는 물론 중국 전역에 이어 동남아시아까지 피로 물드는 비극이 시작된다. 러일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일본의 군부는 한반도 점령에 이어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마침내 1941년에는 미국과 영국을 공격하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 러일전쟁을 잊지 않았던 스탈린 “만주와 조선에서 일본군을 박살내라”
"전쟁의 열매는 힘으로 따지 않으면 확실히 맛볼 수 없다. 러일전쟁에서 우리 러시아가 뺏긴 이권을 모두 찾아오겠다."
이틀이 지난 8월 9일 새벽 0시. 소련군이 일제히 국경을 넘어 만주와 북조선, 사할린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막강의 100만 관동군'이라고 자랑하던 일본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6일 후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뺏은 만주와 북조선, 사할린 북단을 모조리 소련에게 탈취당했다. 정말 무서운 역사의 보복이라고 할 수 있다.
◇ 러일전쟁이 어떻게 해서 식민지배하에 있는 백성들에게 용기를 줬나?
"러일전쟁은 식민지배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당시 우리 조선은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터가 되어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다. 고종황제는 일본이 러시아에게 선전포고하기 직전 '엄정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군이 한양을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보호국 조약을 강요당했다.
이 전쟁은 조선민족에게 용기가 아니라 절망을 준 비극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러일전쟁을 시작으로 일본이 일으킨 모든 전쟁 때문에 아시아 민족은 고통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존망의 위기에 처한 일본이 영국, 미국의 지지를 얻어 국민 한 명 한 명이 힘을 모아서 이긴 방위전쟁이다. 전쟁에 승리하면서 일본은 독립과 안전을 유지하고 국제 위상을 높였으며, 세계에 억압받고 있던 나라에 자립의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아베 수상은 이 글을 인용해 담화를 발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시관을 둘러본 정치평론가 전계완은 <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는 저서에서 이렇게 논평했다.
"러일전쟁 승리가 억압을 받는 나라에 자립 희망을 일으켰다는 것은 완전한 사실 왜곡이다. 러일전쟁 후 조선은 외교권 박탈에 이어 식민지의 나락으로 빠졌는데 일본은 이를 자립 희망이라고 했다. 조선은 자립 희망이 아니라 식민 절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