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진정성의 1차 평가 기준인 이른바 4대 핵심 단어, 식민지배와 침략, 사죄, 반성은 하나도 빠짐없이 포함됐다.
하지만 간접화법 같은 애매한 표현과 제3자적인 언술 등으로 교묘하게 버무린 결과 ‘무늬만 반성문’으로 전락했다.
아베 총리는 오히려 이번 계기에 더 이상의 사죄는 없다는 본심을 과감히 드러냈다. “다음 세대에게도 사죄라는 숙명을 계속 짊어지도록 할 수는 없다”고 한 대목이다.
역사 수정주의 시각도 버젓이 등장했다. 조선의 식민지화를 노린 러일전쟁이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 사람들을 고무시킨 사건이란 주장이다.
중국이 반발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적극적 평화주의’를 강조하는 등 아베 담화는 거침없었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통절한 사죄와 반성이 느껴졌던 무라야마 담화와 많이 대조된다”며 “한국과 중국이 수용하기 쉽지 않은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정부의 대응은 다소 의외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베 담화 하루 만인 제70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유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사죄와 반성을 근간으로 한 역대 내각의 입장이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국제사회에 분명하게 밝힌 점을 주목한다”고 말했다.
이어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공언을 일관되고 성의있는 행동으로 뒷받침하여 이웃나라와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외교부 역시 아베 담화 발표 약 18시간 만에 ‘지각 논평’을 내고 비슷한 입장을 밝혔다.
외교부는 “지금의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와 침략의 과거를 어떠한 역사관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국제사회에 여실히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직접적 비판을 피하고 발표 형식에서도 대변인 성명보다 급이 낮은 대변인 논평을 택했다.
청와대가 대일 원칙주의 외교를 고수해온 점이나, 외교부가 일본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 계승을 강조해온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여기에는 중일관계 급진전에 따른 외교적 고립 가능성과 어찌됐든 전통적 우방인 일본과의 관계 경색 장기화에 따른 현실적 부담이 작용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을 채근하다시피 하는 미국을 의식한 것이란 관측이다.
미 백악관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 성명을 통해 아베 담화를 환영하며 전후 일본이 ‘모든 국가의 모델’이 되고 있다고 추켜세웠다.
정부는 이런 점을 감안해 아베 담화에 대한 사실상의 ‘조건부 수용’을 궁여지책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아베 담화가) 진정성이 있는 것이라면 행동으로 증명해보라고 상대편에 다시 공을 넘긴 것”이라며 “관계 개선의 여지를 남긴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관심은 아베 총리의 언행일치 여부인데 벌써부터 전망이 어둡다.
아베 총리는 담화 발표 하루 만에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료를 납부했고 일부 각료와 국회의원들은 참배를 강행함으로써 주변국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역대 내각의 입장이 앞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란 아베 담화의 내용도 그간 아베 내각의 행태로 볼 때 별로 신뢰하기 어렵다.
더구나 다음 번 전후 담화는 10년 뒤인 2025년에 발표되는데다, 아베 총리는 이번에 일본이 더 이상 사죄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까지 밝힌 상태다.
‘역대 내각의 입장 불변’ 약속은 따지고 보면 빈껍데기나 다름없는 것인 셈이다.
아베 담화의 진정성을 보여줄 핵심 사안인 위안부 문제도 일본의 추가 양보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다.
양기호 교수는 “위안부 문제의 해법이 쉽지 않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임기 말까지도 정상회담을 못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아베 담화가 기대에 못 미침에도 불구하고 유화 제스처를 보냈지만 한일관계는 제자리를 맴돌면서 여전히 아베의 입만 쳐다봐야 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