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1898∼1958)의 막내 동생 김학봉(83·여)씨는 14일 밀양시 삼문동 자택에서 한 연합뉴스와 만나 줄곧 눈시울을 붉혔다.
약산은 일제에 맞서 의열단 단장, 광복군 부사령관 등으로 무장항쟁을 이끈 대표적 인물이지만 해방 이후 북한 정권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서훈대상에서 제외됐다. 월북 이후엔 김일성으로부터 숙청돼 '남과 북이 외면한 비운의 독립운동가'로 불린다.
김씨는 11남매(9남 2녀) 가운데 첫째인 약산과는 무려 34살 터울이어서 약산과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약산이 월북(1948년)하기 직전 약산을 두 차례 본 게 만남의 전부라고 김씨는 기억했다.
김씨는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지만 해방 직후인 1946년 밀양으로 내려와 환영 인파에 둘러싸여 대중연설을 하는 오빠 모습을 보면서 어렴풋이 좋은 일을 했다는 걸 알았다"며 "이듬해에는 설에 내려와 노란 미제 연필을 주며 '공부 잘하라'고 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만남은 짧았지만 사회주의 성향을 띤 약산의 활동과 월북 전력은 김씨와 그 가족에게 길고도 가혹한 세월을 예고했다.
김씨는 약산이 월북하기 직전인 부산 경남여고 재학 때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약산의 행방을 추궁하던 경찰은 교복 차림의 김씨 손·발을 묶은 채 얼굴에 축축한 수건을 얹은 뒤 몇 시간 동안이나 물고문을 했다. 기절하면 뺨을 때려 깨운 뒤 고문을 반복했다.
약산이 월북한 뒤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6·25 전쟁 발발 직후에는 '불온분자'라는 이유로 밀양의 한 견직공장에 구금당했다.
김씨는 굶기를 반복하다가 휴전 무렵 간신히 풀려났지만, 비슷한 시기 끌려간 용봉·봉기·덕봉·구봉 등 오빠 4명은 모두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뜨개질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잇던 김씨는 휴전 직후 독립운동을 한 교육계 인사의 도움으로 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결혼을 해 3남 2녀를 뒀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에 아들 셋은 수년간 고아원에 맡겨 키워야만 했다.
김씨는 "다행히도 생활은 점차 안정됐지만 바깥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도 가족사는 입도 뻥긋 안했다"며 "내가 당한 이야기도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주목되겠다 싶은 건 일절 입 다물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김씨는 2000년대 들어 북방외교 등 영향으로 지역사회에서 약산의 활약상을 알리려는 움직임이 가시화하자 마음을 바꿨다.
그 사이 10명의 오빠·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게된 점도 김씨의 마음을 돌린 계기가 됐다.
김씨는 2001년 북에 있을 약산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면서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며 언론에 처음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이어 2005년에는 서훈을 신청하는 등 '약산 알리기'에 나섰다.
그러나 약산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국가보훈처 심사의 벽을 넘지 못하고 서훈 신청은 번번이 좌절됐다.
약산은 월북한 뒤 국가검열상, 내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김씨는 "북한에 가고 싶어 간 것도 아닌데 (국가보훈처가) 잘 결정해줬으면 좋겠다"며 "최근 영화에서 오빠가 항일운동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이를 계기로 공적이 제대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피력했다.
약산은 광복 이후 좌우합작운동 동지인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8년 남북협상차 북한에 갔다가 귀환하지 않고 평양에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온 천하 사람들이 다 아는 독립운동, 항일운동한 것, 그것만 인정해주면 얼마나 고맙겠느냐. 죽기 전에 큰 오빠 서훈 받아서 '좋은 일'이 생겨야 할 텐데…"라며 다시 눈물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