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겉옷에 사회파 속살…'베테랑' 감독 류승완

[노컷 인터뷰] "사람에 대한 기본 태도 지닌, 자기 일 잘해내는 이들 얘기"

영화 '베테랑'을 연출한 류승완 감독(사진=황진환 기자)
류승완 감독(42)에게 신작 제목을 '베테랑'으로 붙인 이유를 물었다. 최근 서울 삼청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마주한 그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자기 일을 잘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베테랑이라는 말을 자주 쓰잖아요. 어감도 동글동글하면서 경쾌하고요. 작가 프레더릭 포사이드는 소설 '베테랑'을 썼고, 제 전작 '부당거래'(2010)의 OST에도 '베테랑'이라는 음악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베테랑이라 불리는, 자기가 맡은 일을 능숙하게 잘해내는 전문가들에 대한 동경도 갖고 있고요."

여기까지는 사전설명. 본론은 지금부터다.

"기본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어요. 우리는 지금도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이들이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사회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잖아요. 누군가 수백 명을 죽이려는 의도를 갖고 배를 전복시킨 것도 아니고, 테러로 역병이 번진 것도 아닙니다. 베테랑으로서 지녀야할 태도를 잊거나 외면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드는 이유죠."

▶ "자기 일을 잘 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설명, 인상적이다.

= 자기의 중심에 무엇을 놓느냐에 따라 사람은 달라지는 것 같다. 영화 속 서도철(황정민)을 중심으로 한 베테랑 형사들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있다.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돈을 두고 있으면 행동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만약 서도철이 승진에 목매는 사람이었다면 영화 속에서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행동은 못했을 것이다.

극중 서도철은 화물운송 노동자인 배기사(정웅인)가 투신하기 전날 건 전화 두 통을 안 받았던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사건에 뛰어든다. '그 전화만 받았어도 이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라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베테랑의 태도를 영화로 명쾌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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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역수사대와 재벌 3세 사이의 선명한 대립구도를 전면에 내세웠는데.


= 이러한 대립구도는 100년도 더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의도적으로 구조를 꼬거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사회를 집어삼킨 집단 화병이 위험수위에 달하지는 않았나 걱정된다. 지금은 그러한 화가 '해봤자 안 돼'라는 무기력증으로 전이되는 모습이다. 저부터도 세상을 살면서 안게 된 스트레스와 분노를 영화로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저보다 더 큰 스트레스와 분노를 안고 사시는 분들에게 통쾌함을 드리고 싶었다.

▶ 연출하는 데 심경의 변화 같은 게 있었던 건가.

= 30대까지는 농담처럼 무기력증과 같은 상태를 즐겼던 면이 있다. 전작 '짝패'(2006)의 에필로그를 보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안 풀릴 텐데"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말을 농담처럼 못하겠더라. '뻔하다고 해도, 촌스럽다고 해도 좋아'라는 생각으로 일단 저항하면서 "그래도 우리는 안 죽는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이번 영화를 하면서 악에 대한 명확한 편견을 갖고 출발했던 이유다.

▶ 악에 대한 편견이라고 표현했지만, 보편적인 가치판단으로 다가오더라.

= 무엇보다 제 선입견에 충실하고 싶었다. 세련되고 고고하게 보이고 싶은 욕심에 제 솔직한 감정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영화로 세상은 못 바꿔도 관객들에게 쾌감은 드리고 싶었다. 알바비를 못 받고 있던 분이 베테랑을 본 뒤 사장을 찾아가 "일했으니 돈 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기운이 전달됐으면 했다. 대중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태도는 어쩌면 "이 공식 빨리 외워!"라고 무섭게 다그치는 선생님이 아니라, 자신의 삶까지 끌어들이면서 학생들의 입장에 서려는 선생님과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한 태도의 변화가 제게도 왔다.

▶ 그러한 의도가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제대로 구현됐다고 보나.

= 연출하면서 통제하기 힘든 부분이 두 가지다. 위험한 스턴트 장면을 찍을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나머지가 연기영역이다. 저는 판을 만들 뿐 다음은 오롯이 배우들의 몫이다. 그들이 성격이나 역할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다. 연기를 한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살지 않으면 못할 말과 행동들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 영화에 나오는 모든 배우들은 제가 처음에 염두에 뒀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채워 줬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관객 입장에서 즐겼을 정도니 말 다했다. (웃음)

류승완 감독이 영화 '베테랑' 촬영 현장에서 디렉션을 하고 있다. (사진=㈜외유내강 제공)
▶ 전작 부당거래에서는 사법권력, '베를린'(2012)에서는 안보권력, 이번에는 경제권력을 건드린다. 극중 배기사 캐릭터를 통해 노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계기는.

= 저 역시 노동자니까.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을 하는 캐릭터 중 한 명이 배기사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을 알기 쉽게 갑을병으로 봤을 때, 갑이 저지른 일을 두고 매번 을과 병이 싸우는 구조이지 않나. 극중 배기사와 동료들이 밀린 임금을 달라며 경리에게 따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배기사는 한 발 물러서 기다리고 있다가 정당하게 따져야할 대상을 직접 만난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비폭력으로 저항하지 않나. 배기사 역을 맡은 정웅인 선배에게 "손의 정권을 까맣게 분장해야 한다"고 했다. 배기사의 손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을 때 소위 '사람 좀 때렸던 인물'이다. 험하게 살았지만 책임질 가족이 생기고 하면서 성실한 노동자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 영화 속 서도철 형사의 아내 주연(진경)이 조태오 측의 물리적인 유혹에 대처하는 자세도 인상적이더라.

= 당당한 사람이다. 전작 베를린에서 주인공 표종성(하정우)이 "난 우리가 가난해도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솔직히 제게 유사한 유혹이 온다면 주연처럼 행동할 자신이 없다. 극중 주연이 말한다. "정말 쪽팔렸던 건 그 순간 흔들렸던 내 자신"이라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 곧 베테랑은 그 유혹을 이겨낼 것이다. 실제로 제 주변에도 관할 사건이 아닌데도 해결하려 애쓰는 형사 친구, 외압이 이겨내고 기사를 쓰는 기자 친구들이 있다. 그런 친구들이 있으니 세상이 돌아가는 것 아닐까.

▶ 엔딩 신의 공간으로 광장을 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 이 싸움이 서도철과 조태오 둘만의 것은 아니라고 봤다. 극중 시민들이 서도철과 조태오를 둘러싸는데, 그 광장이 서도철의 홈그라운드 같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휴대폰으로 흥미롭게 싸움을 찍던 시민들도 나중에는 조태오가 벗어나려 하자 스크럼을 짜 길을 터 주지 않는다. 인근 문구점 사장으로 특별출연한 모 배우는 "내 동네"라는 진정한 주인의식을 보여 주기도 한다. (웃음)

조태오가 재벌 3세라는 걸 알았다면 광장의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선입견 없이 사실 정황을 지켜보면서 상식적으로 서도철을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학습된 공포, 과도한 자기검열만 이겨내면 우리가 옳은 것을 선택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류승완 감독(사진=황진환 기자)
▶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 설명하기 힘들다. 예전에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화려하게 대답했을 텐데. (웃음) 하지만 언제나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 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즐기고 있다. 직업이기도 하지만, 영화에 대한 로망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니까. 이번 영화에서는 제가 응원하는 주인공이 패배하는 모습을 보기 싫더라.

영화를 찍을 때면 매번 새로운 여행지로 떠나는 느낌이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의 짐이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처럼 부담은 조금 덜 수 있겠지만, 항상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마냥 편할 수만은 없다. 이번 영화는 뭔가 쾌적한 환경이었다. 험난한 여행지였지만, 좋은 동료들과 즐겁게 다녀온 느낌이랄까. 몇 차례 시사를 진행하면서 배우, 스태프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보면서 '우리가 함께했다는 떳떳한 기록이 됐구나'라고 안심했다. (웃음)

▶ 극중 서도철의 "판 뒤집혔다"라는 대사를 기점으로 호쾌한 반격이 시작된다. 류승완 감독에게 영화는 판을 뒤집을 수 있는 무엇인가.

=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가 그랬고, 제 주변 사람들도 경험한 것처럼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은 있다. 탈무드에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으니, 한 편의 영화가 좋은 영향을 끼치고 그것이 쌓인다면 세상이 아주 조금 더 좋아지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1910~1998)의 작품 '산다'(1952)를 보면, 암에 걸린 구청 직원이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데도 헌신적으로 공원 녹지사업을 완수한 뒤 세상을 등진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가 행한 일의 가치를 안다. 그의 영정 앞에 향을 꼽는 아들도. 베테랑을 완성한 뒤 꿈꾸는 것이 생겼다. 제가 나이 먹고 오늘 내일 할 때, 위기에 처한 시민을 구한 경찰관이 "베테랑이라는 영화를 보고는 경찰의 꿈을 키웠다"는 기사 한 줄을 보는 것이다. 참 좋은 삶일 것 같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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