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업원은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때에 설립됐는데, 조선초까지 명맥을 유지해왔으나 불교를 배척하는 유생들의 반발에 따라 태종때부터 폐지 논의가 일어났습니다.
세종 후기에는 폐지 요구가 더욱 거세졌는데, 정업원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와 노비가 폐지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1447년(세종 29) 의정부에서는 “정업원에 있는 비구니의 수에 비해 과도한 토지와 노비를 가지고 있어 형평성에 어긋나고, 또 주지가 옳은 사람이 아니면 유용할 가능성이 높다”며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세종은 “갑자기 정업원을 없애면 갈곳없는 과부들이 있을 수 있으니, 더 이상 비구니들을 받지 말고 서서히 혁파될 수 있게 하라”고 절충안을 제시했고, 결국 1년 후에 정업원은 폐지됐습니다.
하지만 세조 3년에 정업원이 복원되면서 왕실의 보호를 받았는데, 연산군때 다시 혁파되고 비구니들은 도성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그 후 정업원은 한차례 더 복원되기도 했지만 선조때 완전히 폐지된 이후 다시는 복구되지 못했습니다.
■ 세종 29년 (1447) : 정업원을 점진적으로 혁파토록 하다
⇒ 정업원은 선비 집안이나 궁중의 여인들이 출가해서 머물던 비구니들의 처소
여승이 된 과부들을 돌보는 곳이었는데 수 십 명의 과부에 비해 너무 많은 토지와 노비를 가지고 있어 주지가 치부를 할까 봐 새로운 과부를 받지 않는 방식으로 점차 없애기로 하였다
■ 고종 31년 (1894) : 동학 무리들을 구제할 방도를 강구하여 안착시키도록 하다
⇒ 동학혁명에 가담한 일반 농민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하도록 했다
도움말 : 김덕수 (통일농수산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