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조선왕조실록] 황희가 비리에 연루돼 파직당하다

음력 6월 21일

조선왕조실록, 오늘은 조선의 명재상 황희가 청탁 비리에 연루돼 파직됐던 이야기를 전합니다.

1427년(세종 9년)의 일입니다. 당시 좌의정이던 황희에게는 서달이라는 사위가 있었는데 행실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모친과 함께 충남 신창현을 지나가다 그 고을 아전들이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종을 시켜 붙잡아다가 묶어 놓고 폭행했습니다.

이를 지켜본 표운평이라는 다른 아전이 “어떤 사람인데 관원도 없는데서 아전을 묶어 놓고 때리느냐”고 항의를 했는데, 종들은 표운평에게까지 폭행을 가한 뒤 서달에게 끌고 갔습니다. 서달은 표운평이 묻는 말에 대답을 잘못하다는 이유로 마구 때려 급기야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표운평의 집에서 서달과 그 종들을 고소했고, 수사과정에서 종들은 서달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진술하면서 서달은 사형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황희는 신창이 판부사인 맹사성의 고향인 것을 알고 피해자 가족과 원만히 잘 합의해서 사위가 풀려날 수 있도록 손을 써달라고 맹사성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맹사성은 표운평의 형을 서울에서 만나 회유하고, 신창 현감에게도 서신을 보내 서달이 풀려날 수 있도록 요청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재수사가 진행됐는데, 결국 진술 조서 내용이 뒤집어져 서달은 풀려나고 서달의 종들만 처벌을 받게 됐습니다.

당시 자칫 묻힐 뻔 했던 이들의 청탁 비리는 사건의 조서를 읽어본 세종이 무언가 미심쩍은 것을 발견하고 재조사를 지시해서 전모가 드러나게 됐습니다.

세종은 황희와 맹사성을 파직하는 것은 물론 이번 청탁 과정에 연루된 고위 관료 2명과 지방 관리들을 대거 파직했고, 가담 정도가 중한 경우에는 귀양을 보냈습니다.

■ 세종 5년 (1423) : 저화가 너무 많아 가치를 1/3로 줄이다(큰말 상등 1,350장)
⇒ 시중에 화폐(저화)가 많아져 가치를 크게 낮췄다. 좋은 말 1필에 저화 450장 이었던 것을 1,350장으로 조정 하였다

■ 세종 9년 (1427) : 황희, 맹사성을 파직하고 황희의 사돈인 서선의 직첩을 회수하다
⇒ 당시 황희의 사위가 신창현의 무고한 아전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수사를 받았는데, 황희가 이를 무마하기 위해 해당 고을 출신인 맹사성에게 청탁한 사실이 드러나 황희와 맹사성이 함께 파직됐다.

■ 광해 11년 (1619) : 왕이 심한 안질로 군무의 급한 일만 보고케 하다

■ 정조 21년 (1797) : 정약용이 서양의 사설에 빠졌던 일로 사임을 청했으나 불허함
⇒ 정약용이 젊은 시절에 서양의 학문에 빠졌던 잘못을 빌고 사직을 청했으나 거절 되었다

■ 고종 31년 (1894) : 일본 군사들이 새벽에 영추문으로 대궐에 난입
⇒ 일본 군사들이 대궐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청나라와의 국교 단절을 강요 했고, 이 사건은 결국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도움말 : 김덕수 (통일농수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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