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같은 선택'을 했던 두 여인의 '다른 선택'

'구보타 시게코'와 '프리다 칼로'의 경우

구보타 시게코와 백남준 부부 (사진제공=출판사 이순)
'구보타 시게코'는 1964년 도쿄에서 백남준을 처음 만났다. 당시 28살이었던 시게코는 '버자이너 페인팅'으로 일본 화단에서 촉망받던 전위 예술가였다. 반면 백남준은 한국에서 온 이름도 없는 가난한 예술가였다. 만나자마자 서로의 예술성을 알아본 두 사람은 예술적 동지로 지내다, 14년 만에 결혼한다.

세월이 흘러 백남준은 비디오아트 창시자로 세계 미술계에 우뚝 선다.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현대미술의 거장 반열에 오른다. 젊은 시절 촉망받던 시게코는 결혼 후 자신의 예술세계를 지워 간다. 때로 예술적 동지였던 남편 백남준이 이룬 성취를 부러워하고 질투도 하면서.

1996년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그녀는 '비로소 아내가 된 느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침상에 누운 남편을 위해 김치 요리를 한다. 이때 병상에 누운 백남준이 아내 시게코에게 쓴 편지가 지금도 전해온다.


"시게코. 당신은 젊어서는 멋진 애인이었고 늙어서는 최고의 엄마이자 부처가 됐어."

10년 뒤인 2006년 백남준은 먼저 세상을 뜬다. 혼자 남은 시게코는 자전적 에세이 <나의 사랑 백남준>을 쓴다. 자신의 길을 포기한 채 평생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온 그녀는 남편 백남준에 대해 말한다.

"연인으로서는 최상이었지만 남편으로서는 최악이었다."

구보타 시게코도 얼마 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젊어서는 멋진 애인이었고, 늙어서는 최고의 엄마이자 부처였다고 아내를 향해 상양(賞揚)한 백남준의 말이 깊은 애정과 진심어린 감사의 표현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녀는 남편 백남준을 위해 젊어서는 '멋진 애인'이 되어야 했고 늙어서는 '어머니이자 부처'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도 모자라 부처가 되어야만 살 수 있었던 시게코의 인생이 숙연하다. 어디 그뿐인가. 그녀의 일생은, 남편 백남준의 일생으로 기록된다.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부음도 '백남준의 부인'으로 타전됐다.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지는 게임이야."

그녀가 만년에 했던 말이다. 그녀는 지는 게임인 줄 뻔히 알면서도 더 많은 사랑을 준 것이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부부 (사진제공=베르겔 재단)
'프리다 칼로'는 16살 꽃다운 나이에 멕시코 문화운동의 주역인 21살 연상의 예술가 '디에고 리베라'와 만난다. 보는 순간 리베라의 강렬한 작품과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 그를 흠모하게 된다. 이미 이름난 화가인데다가 자유분방하게 살고 있던 그도 어리고 순결한 프리다 칼로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프리다 칼로는 그를 인생에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남자로, 디에고 리베라는 그녀를 영혼의 동반자로 확신한다. 그러나 불꽃같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리베라의 자유분방하고 문란한 여자관계로 결혼이 파경에 이른다. 사랑이라는 묘약이 실망과 배신, 분노의 독약으로 바뀐다. 이혼과 투병과 반복되는 수술로 몸과 영혼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하다."

그녀는 모르핀으로도 가라앉지 않는 통증을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견딘다. 남편 리베라와의 끊이지 않는 불화, 이혼, 지긋지긋한 질병 속에서도 오로지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한다. 1954년 7월 폐렴이 악화돼 4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나는 기꺼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결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녀가 죽기 전 일기에 남긴 글이다. 이생에서 보낸 47년 동안 그의 심신을 덮친 고통이 오죽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썼을까. 32차례의 수술과 도깨비바늘처럼 끈질기게 붙어 다닌 질병들,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여성편력과 광기를 견뎌내야 했던 지옥 같은 나날들. 그녀는 아내의 자리를 내던지고 예술이라는 성채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녀는 고독했고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아팠지만 그럴수록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일구면서 여성의 이름으로 당당히 세계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세월이 흘러 유럽은 물론 세계 미술계는 그녀의 작품에 열광했다. 멕시코 정부는 1984년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기에 이른다.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뛰어넘은 그녀는,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이라 불리지 않는다. 그녀는 화가 '프리다 칼로'일 뿐이다.

예술가인 남자를 사랑하고 인생의 동반자로 선택한 여자 예술가에게 '결혼'은 함정이었을까. 그렇다면 구보타 시게코는 '희생'을, 프리다 칼로는 '예술'을 선택한 것일까.

서울 올림픽공원 내 소마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프리다 칼로의 전시회와 지난 23일 미국에서 전해 온 구보타 시게코의 부음 소식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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