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일본제국의 마지막 외무대신(한국으로 치면 외무부장관)인 시게미쓰 마모루였다. 펜을 잡은 시게미쓰의 손이 떨렸다. "대일본제국이 지다니…." 이 서명 장면은 일본제국의 몰락의 상징이었다.
그는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항복문서에 서명하고는 그 펜을 들고 자리를 떴다. 맥아더 장군의 보좌관들이 화난 얼굴로 시게미쓰가 물러가는 장면을 째려보았다.
조인식 책상에는 항복문서와 함께 '항복 서명용 펜'이 비치돼 있었다. 이 펜은 훗날 미국 버지니아주 노포크에 세워질 맥아더 박물관에 보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책상 앞에 다가간 시게미쓰는 자기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서명한 뒤 자기 주머니에 넣고 절뚝거리며 가버린 것이었다.
그의 오른발은 어떤 문제가 있었나? 바로 윤봉길 의사가 하늘로 날려버린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하는 행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오전 11시 40분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은 땅에 내려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물통 비슷한 폭탄의 안전핀을 뺐다. 물통은 투척용이고 도시락은 자결용이다.
기미가요 1절이 끝날 무렵, 단상 뒤쪽 19m 떨어진 곳에서 군중과 섞여 있던 윤봉길은 단상 앞으로 달려갔다. 단상을 둘러싼 일본 헌병대의 1차 경계선을 뚫고 5m 앞 기마병 앞에까지 뛰어들어 힘차게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노무라 중장과 시라카와 대장 사이에 명중했다.
"쾅~!"
당시 식장에 있었던 20살의 상사 직원 이와자키 타로(훗날 니치니치 경제신문 도쿄지국장)의 목격담을 들어보자.
"폭음소리와 함께 직경 약 2m의 새하얀 불덩어리가 빛을 내며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단상에 있는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연기가 걷히자 단상에는 모닝코트를 입고 비단모자를 쓴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려고 기를 썼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이 사람이 훗날 외무대신이 되는 시게미쓰 마모루였다. 또 한 사람이 보였다. 유연하게 걸어서 계단을 내려오려고 하는 카키색 군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었다. 그는 한두 걸음 내려와서 홍백색 난간에다 왼손을 기댔다. 그 어깨에서부터 팔목에 이르기까지 '푸슛' 하면서 피가 튀어오르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동시에 푹 쓰러지려고 하는 것을 2~3명의 사람들이 달려나가 아래에서부터 부축했다."
이 사건으로 시라카와 상하이파견군 사령관과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가 사망했다. 우에다 중장은 왼쪽 다리를 잘랐고, 노무라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주중 공사 시게미쓰는 오른쪽 다리가 날라가 죽는 날까지 10kg에 달하는 의족을 달고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시게미쓰 마모루는 A급 전범으로 체포돼 도쿄전범재판에서 금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1950년 가석방된 이후 정계 막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 1957년 사망했다.
◇ 롯데의 신격호, 시게미쓰 집안의 사위로 들어가다
하츠코의 외삼촌이 바로 시게미쓰 마모루 전 일본 외무대신이다. 마모루 입장에서는 윤봉길이란 조선사람에게 다리를 바치고, 신격호라는 조선인에게 조카를 준 셈이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한 일본에서 신격호가 대기업을 이룬 배경에는 처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신격호의 일본 이름이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창씨개명)'라니 처가 쪽의 고마움이 느껴진다.
2014년 7월 11일 일본대사관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일본 자위대 창설 60주년 기념식'을 열기 위해 행사장을 예약했다. 이 사실이 보도되면서 롯데호텔에 대해 거센 항의가 이어졌다. 이 사건 때문에 평소 '친일기업'으로 거론되던 롯데그룹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롯데호텔은 부랴부랴 일본대사관에 장소 예약을 취소한다고 통보했다. 결국 이 행사는 일본대사관에서 치러졌다.
일본군 수뇌부에게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윤봉길 의사가 자기의 적이었던 일본군 창립기념식이 서울 한복판의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열리는 모습을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임기상의 역사산책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