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권영철의 Why뉴스
■ 채널 : 표준 FM 98.1 (07:30~09:00)
■ 진행 : 박재홍 앵커
■ 대담 : 권영철 CBS 선임기자
[Why뉴스 전체듣기]
특히 그동안 잊혀졌던 '의열단'과 '신흥무관' 학교를 비롯해 김구 선생과 의열단장 김원봉 등 독립운동가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에 나섰던 '반민특위'의 활동까지 조명한다.
그래서 오늘 [Why뉴스]에서는 "영화 <암살>, 왜 광복70주년을 되돌아보게 하나?" 라는 주제로 그 속사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 영화가 초반 돌풍을 일으키는데?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 결과 개봉 8일만인 29일까지 468만 9,987명의 관객이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 암살은 개봉일인22일 47만 7,581명이 영화를 관람한데 이어 23일 43만 5,045명, 24일 54만 3,254명, 25일 94만 9,237명, 26일 95만 652명, 27일 42만 4,727명, 28일 40만 1,122명, 29일에는 49만 3,994명이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본 댓글에 "1,945만명이 관람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있었는데 아마도 1945년 해방을 상징하는 말인 것 같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천만 관객 돌파는 무난할 것이라는 전망들이 나온다.
영화를 두 번째 보면서도 새로웠는데 최동훈 감독은 영화 작업을 하면서 100번을 봤다고 한다. 그런데 100번을 봐도 새롭게 재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 이 영화가 광복 70주년에 맞춰서 기획된거냐?
<암살> 영화 제작사인 케이퍼필름의 안수현 대표는 CBS와의 전화통화에서 "2006년 영화 <타짜>를 찍은 뒤부터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제작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9년 전부터 영화를 구상했다는 얘기다.
최동훈 감독도 "9년 전부터 영화를 구상하면서 이 이야기를 쓸려고 몇 번 도전을 했다가 실패를 했었다"면서 "그렇지만 그냥 실패했다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만들어 보고 싶었고 그 시대적 향취나 그 때 살았던 인물들이 영화로 나오는 걸 저도 보고 싶을 정도로 대개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최 감독은 "영화를 구상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서 "<도둑들>이 끝난 뒤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 그래서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청사를 보고 오는 순간 써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영화에 착수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안수현 대표도 "2012년 1,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도둑들>을 발표한 뒤 '암살' 제작에 본격 나섰다"고 말했다.
▶ 독립운동을 조명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는 얘기냐?
= 그렇다. 처음부터 독립운동이나 친일 반민족 행위를 다룰 예정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충무로에서는 영화감독들 사이에 '시대를 다루는 영화가 잘 안 된다'는 징크스 같은 게 있다고 한다.
최동훈 감독은 "영화 제작에 착수한 2012년에는 광복 70년 그걸 알 수는 없었다. 보통때 67주년 이런걸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면서 "촬영하다가 개봉하면 70주년이 될거라는 걸 나중에 알았는데 그렇다면 시기도 적절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최 감독은 "시기적으로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으로 그런 점에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면서 "아마 광복 70주년을 염두에 두고 기획을 했더라면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 이라고 덧붙였다. 독립운동이라는 주제 자체가 워낙 무거운 주제다 보니 재미가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안수현 대표는 "1930년대를 영화로 표현해보자는 생각이 많았는데 실제로 1930년대를 찾아가보니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독립운동과 친일의 문제 그리고 방관자의 모습을 다룰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광복 70주년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기획하거나 의도한 영화는 아니었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 영화에는 독립운동과 친일 반민족 행위가 주제로 다뤄지고 있는데?
최동훈 감독도 "처음에는 1930년대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에서 출발했다"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다가 보니까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서 굉장히 긴세월동안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너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최 감독은 "'한국독립운동사'와 '약산(김원봉)과 의열단',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선생과 관련된 책도 보고 그리고 아리랑(님웨일즈)과 그 시대의 풍속사에 관한 책들을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안수현 대표는 "아리랑(조정래) 같은 소설보다는 백범일지나 안중근 평전, 나석주와 김상옥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실제기록을 참고하면서 사실에 초점을 맞추려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영화에서 나오는 차량이나 소품 이런 것들도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고 한다. 영화 제작비의 상당부분이 고증과 사실적인 장면을 묘사하는데 들었다고 한다.
최 감독은 "특히 책 보다는 당시를 살았던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사진들이 말을 걸어온다'"면서 "사진속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어떻게 됐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고 말했다.
▶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서 영화 <암살>이 왜 광복70주년을 되돌아보게 하나?
영화평론가 이명희 씨는 "<암살>은 1930년대 시대적 배경을 성실히 고증하고, 잘 모르는 역사와 당시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면서 "김구와 김원봉, 의열단, 신흥무관학교, 간도참변, 상하이 조계지, 반민특위, 살부계 등등의 역사적 사실들이 무수히 영화에 거론됨으로써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연구위원은 "민족해방 70주년을 맞아 이런 영화가 만들어 졌다는 자체가 반갑다"면서 "그동안 독립운동과 친일의 문제를 제대로 다룬 영화가 없었는데 재미있게 영화를 보면서 근현대사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연구위원은 "영화에서 유명한 독립운동가가 아닌 무명의 독립운동가를 다루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면서 "당시의 어려웠던 생활들을 소개하면서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을 갖고 독립운동을 하는 모습들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이명희 영화평론가도 "영화가 독립운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재미있다"면서 "그동안 1930년대를 다룬 영화들이 많았지만 이렇게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최동훈 감독은 "이 영화는 우리에게 어떤 역사에 대해 확실히 정의해 주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관객들에게 강요하기 싫었다"면서 "다만 저 시대의 한 일면이라도 상징적인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 감독은 "관객들이 이 영화가 끝나고 영화 속의 캐릭터들을 한 번이라도 떠올릴 수 있다면 저로서는 대만족"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실제로 <반민특위>나 <의열단>, <신흥무관학교> 이런 건 생소한 단체들 아니냐?
<반민특위>는 제헌헌법에 "애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제헌 헌법을 근거로 제헌국회는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 제정에 착수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였고 특별감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여러 차례 발표하고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을 제출하는 등 반민특위의 활동을 불법시하고 친일파를 적극 옹호하면서 반민특위는 결국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1년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 나오는 '반민특위'는 우리의 광복이 우리의 해방이 미완이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지만 독립운동가들이 일제 밀정을 처단함으로서 역사적으로는 단죄하지 못했지만 영화에서는 단죄를 완성하는 것이다.
<의열단>은 1919년 삼일만세운동 이후 민족의 독립을 위해 파괴와 암살을 실행한다는 방침아래 만들어진 단체로 암살대상을 조선총독부고관과 군부수뇌,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거두, 밀정 및 반민족적 토호열신 등을 '의열단7가살'로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등 주요기관을 파괴대상으로 정했다. 실제로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박제혁),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최수봉),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김익상),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나석주), 친일파 박용만 암살(유자명) 등을 감행하기도 했다.
당시 의열단 단장이던 김원봉의 현상금이 100만원인데 지금의 시세로 320억원에 이른다고 할 정도였다. 김구 선생은 당시 돈으로 60만원 지금의 가치로 200억원에 이르는 현상금이 걸렸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이회영 선생 등이 개인재산을 털어 중국 만주에 세운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1920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3천명 이상의 독립전사를 배출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이런 독립운동 단체나 반민특위의 활동이 왜 좌절됐는지 이런 문제들이 제대로 다뤄져야 하지만 어느새 잊혀져가고 있는데 영화 <암살>이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석 연구위원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1%만이라도 지적호기심을 갖고 반민특위나 의열단 등에 대해 찾아보고 제대로 역사를 알아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