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법원 겨냥한 과감한 정치적 판결"…대법원의 로비인가

[대법원의 저울과 칼, 그리고 눈②]상고법원 때문에 정치적 판결했다는 지적 잇따라

법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에 저울, 한 손에 칼을 든 채 두 눈이 가려져 있다. 사법 정의가 계급, 지위, 신분, 연고 등을 바라보지 말고 객관성과 공정성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정치권력, 시장권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파기환송 뒤 대법원의 공정성은 의심받고 있다.[편집자 주]

대법원 자료사진
"국회 법사위 의원들은 고등법원 부장판사급으로 '마크맨'이 따로 있어요. 대법원이 의원들한테 상고법원을 설득하기 위해서 의원들 출신, 학벌, 성향, 연고, 종교까지 다 따져서…. 이 정도로 치밀할 줄은 몰랐어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소속된 한 의원 보좌관이 대법원의 로비에 혀를 내두르며 한 말이다. 상고법원 추진을 위해 사법부의 최고기관인 대법원이 입법부인 국회를 상대로 얼마나 노골적인 로비를 펼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22일 법사위 소속 여야 보좌관들의 목격담에 따르면,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는 지난해부터 법사위 의원별로 1대1로 맞춤 부장판사들을 정해 꾸준히 상고법원 설득에 나서고 있다.

의원과 판사가 따로 만나 저녁 식사자리를 갖는 것은 기본이다. 율사 출신 의원의 경우 수십년 전 근무 인연이 있는 판사를 찾아내거나, 의원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일 경우 장로 출신 부장판사를 정해 집중적으로 설득에 나서는 식이다.


◇법사위원 1대1 마크맨부터 지역구 법원장 동원까지…상고법원 위한 전방위 로비

대법원의 로비 타깃은 법사위 소속 의원 뿐 아니라 일반 지역구 의원도 가리지 않는다.

한 지역구 의원은 지난해 말 자신의 지역구 법원장으로부터 직접 '청탁성 전화'가 걸려왔다고 털어놨다. 법원장이 "제 체면 좀 세워달라"며 '상고법원 설치에 관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에 이름을 올려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물밑작업' 덕분인지 새누리당 홍일표 의원이 대표발의한 이 법안에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모두 168명의 의원이 참여했다.

심지어 상고법원 논의 과정을 제대로 모른 채 발의에 동참한 의원도 있다. 한 의원은 상고법원 설치에 반대해 '대법관 증원'을 골자로 하는 정의당 서기호 의원의 법안에도 동시에 이름을 올렸다.

대법원은 국회의원 뿐 아니라 변호사들을 상대로도 상고법원 설득에 나서고 있다. 최근 대구 출신 법원도서관장이 대구지역 변호사들에게 "상고법원 추진해 찬성해달라"는 전화를 돌린 사실이 알려져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이처럼 양승태 대법원장의 임기 후반부 중점과제인 상고법원 설치에 사법부가 '올인'하고 있다. 대법원이 국민적 동의를 얻기보다 국회의원을 상대로 선심을 얻기 위해 전방위적인 로비를 펼치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사법부의 상징성과 독립성을 생각하면 아무리 조직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다고 해도 도가 지나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원칙적으로는 행정기관인 법무부를 통해 입법을 추진하는 것이 맞다. 사법부가 직접 의원들을 상대로 맞춤형 로비를 해가며 입법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삼권분립 정신에 어긋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특히, 국회의원 선거 관리나 정치자금 운영 감독 등을 고위 법관들이 맡다보니 사법부와 입법부의 '거래'를 의심하는 눈길도 있다. 보통 각 지역 선거관리위원장을 해당 지방법원장이 맡고 있는데 국회의원 선거 관리 뿐 아니라 정당 국고보조금 지급, 후원회 설립 및 운영 감독, 정치자금 배분, 자금 운영 감독 업무 등을 책임져 권한이 막강하다.

국회 공청회에 참석했던 이재화 변호사는 "선관위를 담당하고 있는 법원장 등이 지역 의원들에게 전화해서 사실상 상고법원 입법을 강제한 것"이라면서 "의원들에게 물어보니 '눈 밖에 날까봐', '내용을 잘 모르고 눈치 봐서' 발의했다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16일 오후 대법원 대법정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개입 상고심 선고가 진행되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개입 사건의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윤창원기자
◇원세훈 대선 개입 사건 판결과 상고법원의 함수는?

대법원이 지난 16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 개입을 인정한 원심을 깨고 파기 환송한 것을 둘러싸고도 상고법원을 고려한 지극히 '정치적 판결'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대법원은 원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유무죄 판단을 내리지 않는 대신, 2심에서 되살린 핵심 증거들을 기각해 무죄의 가능성을 높였다.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이 걸린 민감한 사안인 만큼 시간을 벌어 정권의 부담을 덜고, 여야 어느 한쪽으로부터 쏟아질 화살을 피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실련은 이번 파기환송을 두고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야당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꼼수"라고 논평했다.

익명을 요구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2심처럼 선거법 위반이 된다고 하면 대법원이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게 되고, 선거법 위반이 안 된다고 했다면 오히려 야권 등에 역풍을 맞았을 것이다. 대법원이 상고법원 설치를 앞두고 아주 영리한 선택을 한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또 다른 검찰 출신 변호사는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두고 여야를 상대로 장사를 한 것 아니냐"며 "대법원은 부담을 피하면서 파기환송심을 맡을 재판부만 아주 피곤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소수의견 하나 없이 전원일치로 원 전 원장의 사건을 파기환송한 것을 두고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이것은 법이론 이전에 몰상식에 가깝다"며 상고법원을 겨냥한 매우 과감한 정치적 판결이라고 해석했다.

대법관 한 명이 1년에 맡는 사건이 3천 건을 넘고 있어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대법원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대법관 위상 제고와 인사적체 해소 등 속내를 의심받는 상황에서 국민을 보지 않고 정치권만을 보는 사법부의 도를 넘은 입법 로비는 논의의 본질마저 흐리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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