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기운 저울·약자를 향한 칼, 대법원은 누굴 보나

[대법원의 저울과 칼, 그리고 눈①]주요 판결에서 정부와 자본 잇따라 편드는 대법원

법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에 저울, 한 손에 칼을 든 채 두 눈이 가려져 있다. 사법 정의가 계급, 지위, 신분, 연고 등을 바라보지 말고 객관성과 공정성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정치권력, 시장권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파기환송 뒤 대법원의 공정성은 의심받고 있다.[편집자 주]

대법원 (자료사진)
'대법원의 저울'이 기울어 있다는 비판이 고개를 들고 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대선 개입 사건에서 공직선거법 위반을 유죄로 인정한 항소심 판결을 깨면서 정권의 눈치나 보는 '정치 대법원'이라는 혹평을 받으면서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전교조 법외노조 소송, 과거사 역주행 판결 등에서는 대법원의 보수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 "대통령 눈치 보기"…정치적 판결 도마에

지난 16일 오후 대법원 대법정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개입 상고심 선고가 진행됐다. 이날 대법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개입 사건의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사진=윤창원 기자)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16일 원 전 원장의 대선 개입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원심을 파기 환송했다.

'국정원 댓글 공작이 정치개입이기는 해도 선거개입은 아니라는 1심의 결론으로 되돌아가자는 거냐'는 비난을 자초한 셈이 됐다.

대법원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유무죄 판단을 내리지 않았지만, 2심에서 되살린 핵심 증거들을 다시 기각해 무죄의 여지를 넓혔다.

특히 대법원은 국정원 직원의 이메일 중 '내게쓴편지함'에서 나온 첨부파일조차 "내용이 조악하다"는 등의 이유로 증거 능력을 부정했다.

이는 업무상 통상문서나 신용할만한 정황에서 작성된 문서를 증거로 인정하는 형사소송법 315조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한 것으로 현직 판사들도 비판할 정도로 법조계에 논란을 낳고 있다.

한 법조계 인사는 "명색이 최고법원이 증거의 실체적 진실은 다투지 않고 증거능력만 판단해 파기환송한데 대해 할 말이 없다"며 "최악의 선고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고법부장 출신의 다른 인사도 "대법원에서 증거능력만 따져 '소수의견'도 없이 만장일치로 파기환송하는 걸 보면서 좌절감을 느꼈다"고 개탄했다.

이 때문에 "제가 댓글 때문에 당선됐다고 생각하느냐"는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에 맞장구를 친 꼴이라는 의심도 일각으로부터 사고 있다.

참여연대는 논평을 통해 "현직 대통령에 대한 눈치 보기 끝에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매우 기회주의적이고, 정치적인 판결"이라고 비난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박주민 변호사는 "증거능력을 인정할 때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했던 항소심과 달리 내용이 조악하다는 등 두루뭉술한 근거만 제시한 대법원 판결은 정치적인 고려가 작용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 노동자를 위한 대법원은 없다


지난해 11월 13일 대법원이 쌍용차 해고노동자 153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해고무효 확인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정리해고가 유효하다는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사진은 쌍용자동차 노조원이 김득중 지부장과 눈물을 흘리고있는 모습. (사진=황진환 기자)
대법원이 하급심의 전향적 판결을 뒤엎은 일은 '노동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그리고 대법원이 휘둔 '칼'은 때론 사회적 약자들의 죽음과 연결되고 있다.

쌍용자동차 대량 정리해고가 정당한 경영 활동이었다며 대법원이 원심을 깨고 사측의 편을 들어주면서 노동자들은 애타게 기다려온 복직의 꿈을 접어야할 위기에 몰렸다.

2009년 집단 해고 이후 자살 등으로 숨진 쌍용차 노동자는 26명에 달한다.

2002일, 약 6년의 시간 동안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싸우면서 '정리해고는 무효'라는 2심 판결로 희망을 품었던 노동자들은 지난해 11월 13일 주심 박보영 대법관의 부연 설명 한 마디 없는 '파기환송' 선언에 눈물을 쏟았다.

임기가 반환점을 넘어선 현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판결의 보수화는 더욱 굳건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지난 3월 1, 2심을 뒤집고 KTX 여승무원이 코레일 노동자가 아니라고 대법원이 판단하면서 청춘을 바친 10년의 싸움은 판결이 내려진 10초 사이에 좌절로 결론 났다.

여승무원들은 원심을 통해 직접고용된 것으로 간주돼 받은 1인당 1억 원가량의 임금·소송비도 토해내야 할 처지이다.

철도노조 김승하 KTX 승무지부장은 CBS라디오에 출연해 "납부를 못하면 바로 신용불량자가 되는데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이혼을 해야하나'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압박감 속에 한 30대 여승무원은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얼마 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철도노조 홈페이지에는 "스물다섯에 KTX 승무원이 된 유난히 잘 웃던 아이는 스물일곱에 해고돼 서른여섯에 생을 마감했다", "'아이에게 빚만 남기고 가 미안하다'며 스스로 생을 마쳤다"는 조사(弔辭)가 올라왔다.

사용자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이 줄을 잇자 사법 정의에 대한 기대는 무너지고, 노동자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사회적 타살'을 당하는 상황이다.

◇ 전교조 죽이기·과거사 역주행

(사진=윤성호 기자/자료사진)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의 효력을 상실시킨 2심의 결정이 파기되고, 시국선언에 참여한 전교조 조합원들이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곳도 대법원이다.

교육부의 법외노조 통보에 반발해 조퇴투쟁, 시국선언 등을 한 전교조 교사들은 또다시 재판에 넘겨져 법의 심판대에 서있다.

대법원이 과거사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조금씩 제한하면서 '과거사 역주행'을 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국가배상 소송의 소멸시효를 3년에서 시효정지 기간인 6개월로 대폭 단축하는가 하면, 과거사위의 조사 보고서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취지의 판례도 만들었다.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정부 보상금을 받으면 손해배상금은 받을 수 없다는 논리를 전개해 과거사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주고 있다.

우리 사회의 보편적 법 기준을 제시하는 정책법원을 자임하면서도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편에 섰다는 의심을 대법원의 판결이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오동석 교수는 "정부가 아무리 바뀌고, 보수화된다고 해도 대법원은 소수자나 약자들의 권리를 고민하고 확보해주는 최후의 보루인데, 이런 역할을 하지 못하면 사법부로서의 존재 의의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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