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18일 CBS 라디오 FM 98.1 (토 16:00~18:00)
■ 진행 : 윤지나 기자
■ 대담 : 4.16인권실태조사단 최예륜 활동가
"이제 끝난 얘기 아니냐." 금지옥엽 키운 자식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아직 듣지 못한 유가족에게, 아직 자녀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실종자 가족에게 가슴을 찌르는 잔인한 말이다. 4.16 인권실태조사단 최예륜 활동가는 세월호 참사와 관계된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참사 당시 정부가 보여준 건 '무능'이었고 그 이후 태도는 '무례함'이었다고 말한다. 조사할수록 절망적인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최예륜 활동가는 멀어지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필사의 탈출을 한 생존 아이들의 말을 전하면서, 그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눈물을 보였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부모들을 배보상을 바라는 사람들로 몰아간 정부가 실제 피해 구제에는 역시 또 얼마나 무능력한가도 함께 고발했다.
▶ 세월호 참사와 그 후속 상황들에서 인권이 침해됐다는 얘기,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있을까 싶다. 워낙 사찰이다 뭐다 얘기가 많아서. 보고서를 쓰면서 예상했던 거보다 더 심하구나, 싶었던 것이 있었나.
= 작업을 하면서 세월호 참사는 '인권이 침몰한 사건'라고 재규정했다. 세월호참사 당시와 그 이후 전과정을 살펴봤을 때 정부의 대책과 대응이 절망적인 수준으로 참사를 더욱 확산하고 피해자를 늘려가는 양상 확인할 수 있었다.
▶ 인권이라는 카테고리로 이 문제를 들여다 보면서 인터뷰를 46명 하셨는데, 이 분들은 무슨 기준으로 정한 것인가?
= 세월호 참사 피해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피해자도 다양하다. 희생학생과 교사가족, 생존 학생, 시신 미수습자 가족, (일반인이라고 불렸지만 저희는 희생자 가족이라고 분류했음) 희생자 가족, 일반인이라고 불린 생존자, 생존한 화물기사, 이주민 희생자 가족, 민간잠수사, 진도어민들, 세월호 가족들 곁을 지켰던 자원봉사자들이다.
▶ 사실 인권은 거대한 개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가 큰 권리인 생명과 존엄에 대한 권리에 대해 얘기해볼까. 당장 수많은 목숨을 잃은 사건이니까.
= 단원고 학생이었던 자녀를 잃은 어머니에게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뭐냐고 질문했더니, 다른분들은 슬픔, 분노, 무기력을 말했지만 이 분은 오로지 '죽음'이라는 단어만 떠오른다고 했다. 인생의 전부였던 아들이 죽은 이후, 살고는 있지만 삶의 목표가 전혀 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살아도 죽어 있는 상태같다고...
어떤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 자체보다 이런 대형사고가 일어났을 때 '내가 구조받을 수 있는가', 그래서 '내 생명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세월호 사건은 국가나 정부가 그 책임을 아예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 그 부분에서는 청취자들도 공감하실 것 같다. 당장 사고 당시에 단 한명도 구해내지 못했다는 절대 상황이 있었다. 그 이후 유가족들이 겼었던 상황들 역시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많았을 텐데 대표적인 게 있다면.
= 가족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하는 유가족들을 향해서 정부는 배보상 액수나 피해지원액수 등을 구체적으로 선전했다. 특히 1주기 들어서 가족들이 마치 피해보상 등 이권을 위해 거리에 나온 사람들인 양 취급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가족들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오히려 피해자들이 삭발까지 해가며 자신들에 대한 피해지원을 거부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 그런 상황에서 감시, 사찰도 당하셨었다. 어느 정도로 시달리셨나? 언제부터 그런 작업들이 진행된 건가?
= 가족들이 사고 소식을 듣고 진도로 내려가서, 가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점부터. 진도 팽목항 체육관에 정보과 형사들이 사복차림으로 상주해 있으면서, 정부의 입장에 강하게 항의하는 가족이 있다면 선동꾼으로 몬다든지 하는 사례가 있었다.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한 조은아 학생 어머니의 경우 초기에 정부의 수색작업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과정에서 큰 소리를 낸다고 선동꾼으로 몰렸었다. 이건 새누리당 권은희 의원 같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마저 확인절차없이 사진을 내보이면서 어떤 집회에 단골로 출연하는 선동꾼, 시위꾼이다 몰아갔다.
▶ 정부가 나서서 피해지원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제대로 이루어지긴 했나?
= 피해지역에 인접해 있는 진도어민들의 경우 사고가 났을 때 구조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건 정부에 의해 동원령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측면이 있다. 이들은 사고 이후 군인이나 경찰 관계자 등이 밤낮없이 상주하면서 조명탄을 쏜다거나 수시로 수색작업을 하는 것을 보면서 당시를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상황이 전쟁처럼 느껴졌고 그런 스트레스로 인해서 밤잠을 못자는 주민들도 많았다.
경제적인 문제가 크다. 진도의 경우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긴 했지만 보상지원 기준이 선박을 보유하고 있느냐 여부로 갈렸다. 200명 정도의 섬 주민들은 바다농사라고 해서 선박 없이 일하시는 분들도 많다. 예를 들어 기르던 미역에 기름이 둥둥 떠 있다든지 전복이 살지 못하는 상황이 됐는데 이런 분들은 선박이 없어서 지원을 못받는다. 지원을 받은 분들과 그렇지 않은 분들 사이에 반목도 생겼다. 공동체가 파괴되는 일도 발생하는 것이다.
▶ 생존 학생들 인터뷰가 참 힘드셨을 것 같다.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는 학생도 있었고...
= 공통된 목소리는 "그것은 구조가 아니라 탈출이었다"는 것이다. 그냥 나온 게 아니라 물이 순식간에 차오르고, 나는 이만큼 빠져 나왔는데 몸이 캐비닛에 낀 친구의 모습, 멀어지는 친구의 얼굴,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다.
▶ 1년이 흐른 시점에서 학생들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 생존 학생들은 이제 고3이 됐는데 배보상 문제와 함께 특례입학 이야기가 무성했었다. 이런 루머를 가지고 일베 같은 데서는 '친구들은 죽었는데 너넨 잘되서 좋겠다' 식으로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했다. '넌 어떻게 살아 나왔니?' 하는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특히 언론이 초반에 심했다. 반면에 쉬쉬하고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것도 힘든 측면이 있다고 한다.
심리치료의 경우도 학생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일방적이고 획일화돼 있다. 초기에 학생들이 입원해있던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너는 아픈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치료를 받게 하거나, 학생들이 연수원에 입소해서 심리지원 프로그램을 받는 과정이 있었는데 마치 시험문제 풀듯이 천개에 달하는 문항을 한꺼번에 답변하라고 하거나...
▶ 이번 인권실태조사가 의미있는 점 중 하나는 ‘아 이런 피해도 있었구나’하는 발견. 기억에 남는 지점은?
= 슬픔의 무게나 고통의 정도에 따라 차별을 둬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다양한 피해자들을 만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면 경제적인 문제를 포함한 개인적 사정으로 수학여행에 아예 가지 못했던 학생들, 당시 단원고 1,3학년 재학 중이었던 학생들, 동료들과 제자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지원업무를 해야만 했던 교사들 등이다.
특히 세월호 아르바이트생 탑승객 4명 중 생존한 2명은 아무런 정부 지원 없이 현재 군대에 가 있다. 정부는 지원 대책이 없다고 한다. 그 분들은 인터뷰하질 못했는데 정신적인 트라우마 등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주민 노동자의 경우도 언어소통지원조차 되지 않고 있어서 참사 이후에 지원문제나 진실규명 과정에서 모두 소외돼 있음.
4. 16 이전과 이후가 달라져야 한다는 고민을 갖고 '4.16 인권선언'을 준비하고 있다. 피해양상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피해자들이 무너졌던 삶의 가치와 공동체의 가치를 다시금 세워나가기 위한 작업이다. 관심을 가져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