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지난 16일 원 전 원장의 사건에서 국정원 트위터팀 소속 김모씨의 이메일에서 발견된 2개의 첨부파일에 대해 증거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425지논', 'ssecurity'라는 이름의 두 파일이었다.
원 전 원장의 지시사항과 업무일지 등이 담겨있어 원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여부를 가를 핵심 증거로 항소심에서 채택됐었지만,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일부 내용이 조악하고 개인적인 부분이 포함돼 있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제출된 증거들의 증거능력이 부정된 상태에서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유무죄 판단도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박근혜정권의 정통성을 흔들 수 있는 예민한 정치적 사안에 법률심임을 내세워 증거능력을 문제 삼고 사건을 파기 환송하는 것으로 정권에 시간을 벌어줬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이 판단을 유보하면서 여권은 당장 내년 총선 전까지 정통성 논란에서는 빗겨갈 수 있게 됐고, 핵심 증거들이 채택되지 않게 돼 무죄의 여지가 그만큼 더 커졌다는 해석이다.
대법원이 상고법원 설치를 추진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권에 부담을 주기는 현실적으로 곤란했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박주민 변호사는 "증거능력을 인정할 때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했던 항소심과 달리 내용이 조악하다는 등 두루뭉술한 근거만 제시한 대법원 판결은 정치적인 고려가 작용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현 정권이라는 강자의 손을 들어준 판결이고, 최근의 대법원 기조와 맞닿아 있다는 평가마저 내놓고 있다.
지난해 대법원은 쌍용차 정리해고 직원 158명이 쌍용차를 상대로 제기한 해고무효소송 상고심에서 2건 모두 정리해고의 필요성을 받아들여 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자살과 지병으로 25명의 동료를 떠나보낸 쌍용차 직원들의 패소가 확정되자, 권영국 변호사는 "한국에서 사법적 정의는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올 초에도 대법원은 오모씨 등 KTX 여승무원 34명이 코레일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내면서 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여기에 대법원은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서 잇따라 원고 패소 판결하며 유신시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행사권 자체를 옹호하는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월 대법원은 1978년 서울대 재학 중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에게 체포된 뒤 약 20여일간 불법 구금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최모씨에게 패소 판결했다.
앞서 지난해 10월에는 "긴급조치 위반자 전부가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수사과정 등에서 공무원의 불법 행위가 있었던 경우에만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며 국가의 책임을 제한했다.
이처럼 대법원이 정치적으로는 보수화, 경제적으로는 강자인 사측 위주 판결을 내놓는 경향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근본적으로 대법관 구성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서강대 이호중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관 추천위원회에서부터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을 반영할 수 있도록 대법관을 다양할 필요가 있다"며 "엘리트 법관 출신들만으로 구성된 대법원으로는 폐쇄적인 기조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