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영만 아저씨를 보면서 우리를 그렇게 부르던, 또 다른 아저씨가 떠올랐습니다. “뚝따라따따 뚝딱따 뚝딱이네 마~을!” 하며 재잘재잘 떠들던 그 아저씨.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뚝딱이 아빠를 봐오면서 자란 여대생입니다. 최근 방송에 김영만 아저씨가 나와서 사람들이 되게 좋아했는데요. 저의 어렸을 적 기억에는 영만 아저씨보다는 뚝딱이 아빠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그리고 뚝딱이 아빠는 뭐하고 지내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도 물론 궁금하고요. 시간이 되신다면 만나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나요?"
안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요즘에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하면 어떡하지...하지만 그건 기우였습니다. 뚝딱이 아빠는 "그럼요!"라고 너무나 흔쾌하게 대답해주셨어요.
약속을 잡고 아저씨가 운영하는 남양주의 카페로 갔습니다. "제 고향엔 강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자리를 선택한 거예요."
뚝딱이 아빠가 거짓말처럼 제 앞에 앉아있습니다. 나의 친구이자, 선생이요, 아빠요, 감히 나를 키워주신 분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뚝딱이 아빠입니다.
◇ "고향을 찾은 느낌일거예요"
아저씨도 마리텔에서 영만 아저씨를 보셨대요. 뚝딱이 아저씨도 김영만 아저씨를 무척 존경하고, 좋아한다고 해요. 어린이 프로그램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똑같아서 마음을 안다나요. 어른들이 영만 아저씨를 보고 열광했던 이유는 현실에 치여 오갈 데 없는 '어른'들이 방송을 보며 어린 시절 뛰놀았던 고향에 간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대요.
그러면서 자기는 여전히 TV에서 볼 수 있으니 힘들고 어렵고 외로울 때 EBS에서 '번개맨과 함께하는 모여라 딩동댕 토요일'을 봐달라는 '센스'도 발휘하셨습니다. 역시나 재밌으세요.
◇ 저만 아저씨가 보고싶었던게 아니었나봅니다
우리들이 뚝딱이 아빠를 그리워 한 것처럼, 뚝딱이 아빠도 90년대 아이들을 그리워했어요.
요즘 공개방송 녹화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예전만큼 아이들의 에너지를 느낄 수 없다고 해요. "나 뚝딱이 아빠야!" 하고 인사를 건네 보아도 쭈뼛대며 엄마만 찾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고 했어요. 바깥에서 뛰어놀지 못하고 집 안에서만 생활했던 부모들의 '과보호'가 아이들을 바꿔놓은 것일까요. 호기심에 가득 찬 아이들의 눈망울, 힘찬 목소리로 "뚝딱이 아빠!" 하고 불러줬던 옛 친구들이 그립대요.
"김영만 선생님이나 저한테 관심을 갖는 건 사실 아무 의미 없어요. 뚝딱이 아빠로 살면서 평생 CF를 한 편도 못 찍었는데 갑자기 CF가 들어오겠어요? 사실 우리에게 관심을 갖는건 어린이들을 향한 사랑을 키울 수 있는 기회에요."
아저씨는 "우리들에게 관심을 갖는 건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는 기회"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어른들이 잃어버렸던 동심을 되찾게 될 것이고, 그것이 어린이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나타날 수 있대요.
◇ 제2의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소파 방정환 선생의 얼을 이어받은 실존 인물이 한 사람 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벌써 뚝딱이 아빠로 산지 20년이 되었습니다. 개그맨 김종석에서 뚝딱이 아빠가 된 건 '신의 한수'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의 뚝딱이 아빠가 되기까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MBC에서 프로그램을 여덟 개나 할 만큼 인기를 누리던 전성기 시절, EBS ‘딩동댕 유치원’에서 섭외가 들어왔고, 심각하게 고민을 했어요. 뚝딱이 아빠가 되면 ‘개그맨 김종석‘으로서의 삶은 포기해야했거든요. 대중들에게 인기가 줄어듦은 물론이고 수입도 당연히 줄겠고요. 하지만 그는 뚝딱이 아빠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코미디 프로를 하고 나면 항상 못 웃겼다는 아쉬운 마음이 남았는데, 어린이 프로그램은 달랐거든요."
그를 뚝딱이 아빠로 만들어 준 결정적인 계기는 어린이에게 기쁨을 줬다는 ‘뿌듯함’이었습니다.
뚝딱이 아빠가 되고선 처음엔 정말 많이 힘들었어고 하시네요. 예상대로 수입도 많이 줄었고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도 점점 사라진거죠.
하지만 5년, 10년,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아저씨가 선택한 길에 확신이 생겼다고 해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 라는 말과 어린이날을 만들어 어린이를 위해 사셨는데, 그분의 얼을 이어받은 실존 인물이 한 사람 쯤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먹고 ‘어린이 프로그램에 대한 전문화’ 를 목표로 삼았어요. 어린이 프로그램을 할 때, 그 PD들이 프로그램이 끝나면 시청률을 살피는 모습이 안타까웠어. 어린이 프로는 철저히 공익적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50만명이 보는 어린이 프로와 5천만명이 보는 시청률을 똑같은 잣대에 놓고 평가를 하는건 옳지 않다고, 시청률을 없애야 한다고 했어요. 방송통신위원회가 보고 있다면, 참고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 머리에서 가슴으로 느끼기까지 걸린 15년
"처음부터 어린이들에 대해 잘 알았던 건 분명 아니었어요. 어려운 점이 많았죠. 어린이 프로그램을 하면 할수록 어깨는 물론이거니와 머리도 무거워졌어요. 어린이 프로그램을 한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어린이에 대해서 모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아이와 눈높이 맞추는 방법을 깨닫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아이들을 대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하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데 15년이 걸렸어요. 이제야 조금이나마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어요"
신영복 선생님이 그러셨죠. 머리에서 마음까지 가는 여행이 제일 먼 여행이라고. 아저씨는 그 멀고 먼 여행을 꿋꿋하게 해 오셨네요. 정말 멋집니다.
아저씨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아이들을 알고싶다는 욕심이 점점 더 커졌다고 하셨어요. 결국엔 9년에 걸쳐 아동학 박사가 되셨어요. 그리고 지금은 유아교육학과 교수로서 미래의 꿈나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될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어요.
뚝딱이 아빠가 아닌, 교수로서의 김종석은 어떨까요. 지금 아저씨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은 저처럼 뚝딱이 아빠를 보며 자라온 친구들 일겁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학생들이 뽑은 최우수 교수로 뽑혀서 자동차를 선물로 받았다며 어깨를 으쓱거려주셨어요. 부럽습니다. 자동차를 선물로 받은 아저씨가 아니라 그런 뚝딱이 아빠를 매일 보는 그 학생들이.
◇ 뚝딱이는 내가 결혼해서 낳은 아이
그에게는 개구쟁이 아들이 한 명 있죠. 20년 째 일곱 살인 꼬마. 따라서 아빠도 20년째 서른 다섯살로 만들어 버린 사랑스러운 아들 '뚝딱이' 입니다.
◇ 내 아이라고 생각했다면 세월호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겠죠
'모든 아이가 내 아이다'라는 마음은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죠. 작년만 하더라도 그래요.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이 '미안하다'는 말을 했던가요.
"세월호 선장이 가는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을 '내 아이'로 생각했다면 무책임하게 도망가진 않았겠죠. 그러면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아저씨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이거래요. 아이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뚝딱이 아빠 고맙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느꼈던 건 딱 하나입니다. 아저씨에겐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다는 것. 그가 '개그맨 김종석'에서 뚝딱이 아빠로, 뚝딱이 아빠에서 유아교육학과 교수가 된 건 모두 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사실 뚝딱이 아빠를 만나면서 아빠, 라는 말을 오랜만에 해 봤어요. 이 단어가 이리도 따뜻한 말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20년 동안 한결같이 어린이들의 친구, 뚝딱이 아빠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따뜻한 아빠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늘, 영원히 뚝딱이 아빠로 남아주세요. 뚝딱이 아빠의 그때 그 기억을 되새기며 마지막으로 다 같이 불러볼까요.
"뚝따라따따 뚝딱딱 뚝딱이네 마을! 수리수리 뚝딱뚝딱 뚝딱이네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