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것은 주먹질과 발길질이었다.
"이XX가 하라면 하는거지~ 뭔 말이 많아…"
김희갑은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인근 백병원에 입원했다.
이 사실은 이틀 후 동아일보에 '권력·폭력 앞에 떠는 영화계'라는 기사가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김희갑은 기자에게 "영화배우 최무룡과 김진규 등 임화수한테 안 맞은 사람이 거의 없다"며 "권력과 폭력의 무방비지대에 있는 나 같은 연예인들을 보호해달라"고 호소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경찰은 마지못해 임화수를 불구속 입건했다. 그리고는 "미약한 폭행이 있긴 했지만 양자가 합의한 것으로 안다"며 임화수를 두둔하기에 바빴다. 결국 임화수에게 내려진 처벌은 벌금 3만환이 전부였다.
이 와중에 김승호와 최무룡 등 현역배우 7명은 "임화수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부탁한다"며 검찰과 법원을 드나들었다. 되레 임화수는 구타사건 한달 후 영화인들의 추대에 따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직에 오른다. 가히 '연예계의 황제'라고 불릴 만하다.
◇ 경무대 '빽'을 밑천으로 이정재에 이어 주먹계 대부에 오르다
초등학교를 다니다 만 임화수는 소매치기, 장물취득 등의 죄목으로 형무소를 들락거리다 극장 직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해방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평화극장을 헐값으로 인수한 뒤 영화사를 창업하면서 연예계의 대부로 떠오른다.
여주 출신인 그는 옆동네인 이천 출신의 정치깡패 대부 이정재와 인연을 맺고 동대문사단의 2인자로 군림한다. 그는 발빠르게 권력의 총산 '경무대'로 발을 넓힌다.
임화수는 경무대의 실세인 경무관 곽영주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기가 나이가 더 많은데도 "형님~ 형님"하며 극진히 모시면서 인연을 맺었다. 연예계에서는 곽영주에게 여배우를 수시로 '상납'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한다.
곽영주는 김희갑을 팼다는 혐의로 임화수가 경찰에 불려다니자, 수사책임자들을 불러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곽영주는 "이봐~ 임화수 씨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 예술계의 대표적 인사요, 앞으로 문교부장관이 되실 분이란 말이야"라고 으름장을 놨다고 한다. 아마 3.15부정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지고 이승만이 4선을 했다면 깡패 임화수는 문교부장관에 취임했을 것이다.
곽영주의 주선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경무대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일화다. 임화수는 다짜고짜 큰절을 올리면서 "마치 돌아가신 아버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각하~ 제가 아버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라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간청했다. 이 말에 껌뻑 죽은 이승만은 임화수를 수양아들이라며 총애했다고 한다.
이것도 모자라 1959년에는 노골적으로 이승만을 찬양하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제작에 나섰다. 자유당으로부터 4천만환이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지원받아 국내의 내노라하는 스타들을 총출동시켰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이승만의 이미지는 흠결이 하나도 없는 늠름한 우국청년의 모습이다. 재미있는 것은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망명하자 임화수는 잽싸게 <아아, 백범 김구 선생>이란 영화를 제작했는데, 여기서는 백범을 찬양하고 이승만을 형편없는 인물로 바꾸었다고 한다.
◇ 연예계를 넘어 정치깡패 보스로 나서면서 명을 재촉하다
운명의 1960년 4월 18일 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던 고려대학생들은 경찰 백차와 보도차량의 선도를 받으며 귀교길에 올랐다. 수많은 시민과 고교생들도 뒤를 따랐다.
행렬이 을지로 4가 천일백화점 근처에 있는 대지다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도로 옆 골목에서 괴한들이 뛰어나와 시위대를 습격했다. 자유당의 지시를 받고 임화수가 동원한 깡패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백여 명에 달하는 괴한들은 쇠망치, 삽자루, 갈고리, 벽돌 등 각종 흉기로 닥치는대로 대학생들을 두둘겨패기 시작했다.
"테러단이다", "빨리 집결해라", "우리는 죽는다"하는 학생들의 절규가 잇따랐다. 뒤통수를 벽돌로 맞고 쓰러지는 학생, 경찰 백차에 실려가는 피투성이 학생, 앞가슴에 피를 흘리며 깡패들에게 덤벼드는 학생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괴한들의 행동은 너무나 재빨랐다. 이들은 대학생들이 대오를 정비하자 재빨리 골목길로 사라졌다.
동이 트자 시민들이 거리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날 파도같이 시내로 몰려 들어오는 시민들을 보면서 벅찬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는 중년남자가 있었다. 바로 임화수에게 폭행을 당한 배우 김희갑이었다. 그는 다음날 백병원을 찾아가 의연금과 사과박스를 전달했다.
◇ 서대문교도소에 집결한 이승만 정권의 실세들
서대문형무소가 전대미문의 '호황'을 누린 것이다. 자유당, 민주당, 혁신계, 군부, 언론계, 교원노조… 당연히 곽영주와 그가 비호하던 깡패 두목들도 잡혀왔다.
임화수는 여기서도 치졸한 행동을 반복한다. 자신만 살아남으려고 3.15 부정선거에 개입한 것과 각종 정치테러와 고대생 습격사건의 책임을 이정재에게 미루기에 바빴다. 이 때문에 사형수들이 마지막으로 가족면회를 하던 날 임화수와 마주친 유지광이 죽일 듯이 튀어나갔다. 그를 전 내무장관 최인규가 가로막아 불상사를 막았다고 한다.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대에 섰을 때 발버둥을 치다가 겨우 체념을 했다. 교도관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 설교를 듣겠습니까?"
"나는 불교신자요. 불경 몇 구절 외우겠습니다."
임화수는 금강경을 외워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유언으로는 "늙으신 어머님을 두고 먼저 떠나게 되어 죄송스럽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세월이 흐른 후 임화수를 두고 고은 시인이 시를 썼다.
"언제나 흰 양복정장 하루 럭키담배 세갑/ 윗주머니 화려한 손수건이 꽂혔다/ 구두에는 먼지 하나 앉지 못한다/ 먼저 눈빛으로 죽였다/ 다음 한마디 말로 죽였다/ 이 두 가지가 아까우면 처음부터 한방 주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