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싣는 순서
①여전히 '사령탑'은 없다…국민 못 지키는 정부
②'밀접접촉'과 '에어포켓'…가설이 화 불렀다
③구조는 '언딘'에 방역은 '삼성'에…국가는 뭘했나
④사태 키운 '정보 은폐'…'유언비어' 칼날만
⑤국민에 '폭탄' 돌리는 정부…진상규명이 해답이다<끝>
보건교사의 입에서 나온 감기 대처요령이 아니다. 지난달 16일 서울 강남구 대모초등학교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내놓은 '메르스 처방'이다.
박 대통령이 "메르스는 중동식 독감"이라며 "손 씻기라든가 몇 가지 건강습관만 잘만 실천하면 메르스 같은 것은 무서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던 지난달 16일은 어떤 날인가.
이날 오전 메르스로 인한 사망자가 3명 늘어나 누적사망자가 19명으로 늘어났다. 숨진 3명 중 2명은 평소 지병도 없던 50~60대의 건강한 성인인데도 메르스로 목숨을 잃었다.
이로부터 불과 나흘 전 대모초등학교에서 1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삼성서울병원에서는 2차 메르스 유행 잠복기가 끝나자마자 이 병원 이송요원인 137번(55) 환자를 포함해 7명의 환자가 무더기로 발생, 3차 메르스 유행 공포가 번지던 시점이었다.
당시까지 메르스 확진자는 154명. 이들 중에, 아니 이후 발생한 환자를 포함하더라도 '박 대통령식 메르스 처방'을 어기고 편식하거나 손을 자주 씻지 않아 메르스에 걸린 환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박 대통령은 단순히 아이들에게 기초적인 위생습관을 지도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보건당국은 메르스 확산 책임을 환자 탓, 국민 탓으로 미뤄왔다.
173번 환자 최모(70·여)씨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정부가 방조하고도 국민 책임으로 돌린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질병관리본부는 "최씨가 돌보던 환자가 '이분은 평상시에 건강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해 정보를 주지 않았다"며 최씨가 돌보던 환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전체 메르스 확진 환자 186명 중 절반이 넘는 98명이 격리대상에 오르지 않아 국가 방역망 밖에 무방비로 놓여있다가 메르스에 감염됐고, 이 가운데 15명이 목숨을 잃었다.
보건당국은 또 신규 메르스 확진자의 감염경로를 밝힐 때마다 "주요 전파자와 접촉해 감염됐다"는 설명을 되풀이하곤 했다. 이러다 보니 애먼 국민들이 '슈퍼 전파자'(Super-Spreader)란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하지만 정확한 역학조사를 마치지도 않은 보건당국이 공식 브리핑 석상에서 특정 환자를 '감염원'으로 몰아 발표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가령 보건당국은 지난 5월 27~29일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서 메르스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환자가 나타날 때마다 "14번(35) 환자와 접촉했다"고 밝혀왔다.
하지만 당시 응급실 안에서는 14번 환자 외에도 이 환자를 진료한 의료진의 의료 장구 등 다른 감염매개체를 통한 4차 감염이 이뤄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36명의 환자가 발생한 평택성모병원에서도 매번 1번 환자를 '감염원'으로 지목해왔지만, 나중에 병원 곳곳이 오염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병원내 3차 감염도 일찌감치 이뤄졌을 것으로 당국조차 추정하고 있다.
지난 14일 열린 국회 메르스 대책특위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 김영환 의원도 "35번(38) 환자가 14번 환자를 접촉하자마자 기침을 하고 사나흘 만에 증상이 발현돼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얘기냐"라며 보건당국의 역학조사 결과에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국이 만든 '슈퍼 전파자'야말로 정부의 허술한 방역 대응으로 뒤늦게 치료받아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피해자다.
보건당국은 또 기저질환이 없던 사망자가 연거푸 발생하자 "고혈압도 심혈관계 질환" 식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65세 이상 고령자는 기저질환이 없다고 얘기할 수 없다"며, 평소 건강했던 이들도 '고위험군' 안에 뭉뚱그렸다.
특히 지난 14일엔 "메르스 관련 질환 치료비는 당국이 부담하지만, 기저질환에 대해서는 (환자 본인이) 별도 부담한다"고 밝혔다. 기저질환을 둘러싼 그간의 '무리수'가 책임 회피뿐 아니라 보상 대상까지 줄이려는 '꼼수'란 힐난이 나오는 대목이다.
부실 방역 책임을 국민에 떠넘기려는 화살은 비단 환자만을 겨냥하지 않았다.
당국은 "간병인, 보호자들이 통제받지 않고 환자들에게 노출돼 병원 감염이 더 확산됐다"며, 이른바 '떼문병'과 '의료쇼핑'을 메르스 확산의 주범으로 지목해 '대국민 계몽'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떤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지난 7일 발표한 '2014년 보험료 부담 대비 급여비 현황 분석' 자료를 보면, 건강보험에 가입한 1616만여 가구 중 871만여 가구(53.9%)는 낸 보험료보다 받은 급여비가 적었다.
즉 절반 이상의 국민은 병원을 잘 이용하지 않았으며, 특히 저소득층일수록 병원에 자주 가지 않은 것으로 분석됐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 평가단은 이러한 보건당국의 분석을 그대로 인용, 지난달 13일 "한국 사회의 특정 관습과 관행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불과 닷새 동안 메르스 바이러스 변이 및 해외 유출 가능성을 집중 조사했던 WHO 조사단이 한국 병실 문화까지 직접 관찰했을 것이라 보긴 어렵다.
설혹 '간병 문화'가 문제라면 환자 보호와 병실 통제 의무를 이제껏 보호자나 사적 고용 간병인에게 떠넘겨온 보건당국과 대형병원이 책임을 피해가기도 힘들다. 2013년에야 포괄간호서비스제도 시범사업을 시작할 만큼 낙후된 '간병 제도'는 누구의 책임일까.
"세월호 참사는 기본적으로 일반 교통사고"(주호영 의원)라거나 "조류독감(AI)이 발생했을 때도 대통령에 책임을 묻냐"(조원진 의원) 는 식의 '망언'들이 줄을 이었다.
참사를 단순 사고로 몰아 부실 구조 책임을 피하려던 여권의 발언들은 아직도 세월호 유가족들의 가슴에 한(恨)으로 맺혀있다.
정부가 세월호 실소유주로 지목한 세모그룹 유병언 전 회장, 세월호 이준석 선장, 해경 김경일 전 123정장을 겨냥한 '폭탄 돌리기'는 아직도 법정에서 현재진행형이다.
메르스 사망자 유가족들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함께 대정부 법정투쟁을 시작했지만, 그 앞길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이 그동안 겪어온 현실 그대로 재연될 가능성도 높다.
사태의 진상을 규명해 책임자를 밝혀달라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요구는 "배·보상으로 해결하자"는 답변으로 묻으려 했고, "종북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는 이념 공세도 난무했다.
심지어 어렵사리 만든 '세월호 특별법'에 따른 특별조사위원회 구성 과정에서 이른바 '시행령 꼼수'로 참사의 직접적 책임이 있는 해양수산부 등 공무원들을 채워 넣으려다 거센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를 해소하려는 과정에서 입법부의 정당한 합의 절차가 대통령의 거부에 막히고, 내쳐 여당 원내대표까지 '괘씸죄'로 내쫓기는 헌정 사상 초유의 상황도 발생했다. 정부의 책임을 묻는 길이 험난의 연속임을 고스란히 보여준 것이다.
메르스 유가족의 소송을 맡은 신현호 변호사는 "성폭행 피해자나 왕따를 당한 학생에게 왜 남성들과 어울렸느냐, 왜 친구들과 사귀지 못하냐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며 "국민이 감염되지 않게 보호할 의무는 정부에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유가족들은 보상보다도 숨진 사망자들의 명예회복을 원하다"며 "다시는 메르스 사태와 같은 정부의 무능한 대응이 없도록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히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메르스 참사 역시 보건당국과 병원들의 모든 기록을 증거로 남김은 물론, 최근 서울시가 내놓은 '메르스 징비록'처럼 참사에 다각적으로 접근해 진상을 규명할 수 있도록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다.
국가 임무와 권한은 민간에 떠넘긴 채 각종 정보를 은폐해 국민들을 숨지게 만든 '최종 책임자'의 책임을 묻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