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우리은행 박신자컵 서머리그가 10일 결승전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개막 첫 날이었던 지난 6일 강원도 속초실내체육관에는 박신자(74) 여사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 의미를 더했다. 도열한 후배들의 환영을 받으며 체육관에 입장한 박신자 여사는 "내 이름을 딴 대회가 열린다는 것은 내 생애의 보너스"라며 기뻐했다.
대회에 출전한 요즘 선수들은 박신자 여사에 대해 잘 모른다. 어떻게 농구를 했는지 잘 모르고 경기 영상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그럴만도 하다. 박신자 여사는 1960년대에 선수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모르는 후배 선수는 없다. 한국 농구 역사에서 '전설'로 불릴만한 몇 안되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박신자 여사다.
한국 여자농구는 1967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세계 2위. 요즘 한국 농구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업적이다.
대회 MVP는 박신자 여사였다. 준우승 팀에서 MVP가 나왔다. 그만큼 활약이 대단했다. 박신자 여사는 대회 6경기에서 평균 19.2점을 올려 전체 4위를 차지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국 농구가 세계 무대에서 이보다 좋은 성적을 거둔 적은 없었다. 여자농구가 은메달을 딴 1984년 LA 올림픽은 공산권 국가들이 불참한 반쪽 대회였다. 게다가 세계 대회 MVP는 전무후무한 업적이다.
대표팀 최장신이었던 박신자 여사의 신장은 176cm. 국내에서는 단연 압도적인 장신 선수였다. 당시 170cm를 넘는 센터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동유럽 팀들에는 190cm 이상의 장신 선수들이 즐비했다. 당시 대표팀은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농구를 했다.
박신자 여사는 "서구에 비해 신체 조건이나 모든 면에서 열악했다. 그러나 우리처럼 작은 선수들이 그렇게 빠르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오히려 상대가 당황했다. (서구 농구가) 우리 농구에 적응하는 데까지 3-4년은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박신자 여사는 1964년 제4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 대회에서 월드 베스트5에 선정되며 이미 세계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대회가 끝나고 은퇴를 고려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현역 생활을 연장했다.
이후 1967년 세계선수권 대회 준우승이라는 업적을 달성했고 그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일본을 꺾고 우승을 차지, 국민적 자부심을 심어줬다. 1967년 11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박신자 여사의 은퇴 경기에는 7000여 명의 농구 팬이 몰려들어 뜨거운 인기를 반영했다.
24살 때 은퇴를 고민했고 27살의 나이에 코트를 떠났다. 박신자 여사는 "지금은 27세가 젊은 나이라고 하지만 그 때는 22살이 넘으면 나이가 들었다고 했고 25살이 넘으면 시집 가기도 어려웠다. 지금과 비교하면 40세가 될 때까지 운동한 것과 비슷하다"며 웃었다.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다
미국 테네시주 낙스빌에는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 회관이 있다. 선수나 감독으로서 혹은 종목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을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 총 139명의 '전설'들이 헌액돼 있다.
주로 미국 여자농구를 빛낸 인물들이 헌액돼 있다. 그런데 박신자 여사는 명예의 전당이 설립된 1999년 초대 헌액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다. 세계 여자농구의 역사에서 박신자 여사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박신자 여사는 '미국 농구의 어머니'로 불리는 팻 서미트 전 테네시 대학 여자농구 팀 감독 등과 함께 첫 해에 등재되는 영예를 안았다.
박신자 여사를 분류한 카테고리는 '공헌자(contributor)'다.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는 박신자 여사에 대해 '12년 동안 아시아에서 가장 눈부셨던 선수'라며 1967년 대회 수상 경력과 이후 행정가로서의 공헌 등에 대해 소개했다.
박신자 여사는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대부분 미국 농구인들이었는데, 대우를 잘 받은 것 같아 기분은 상당히 좋았다"며 웃었다.
◇체코 탈출 작전
대회가 열린 체코는 당시 공산권 국가였다. 냉전 시대였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비공산권 국가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찔한 일도 벌어졌다. 한 농구 관계자는 "당시 대회 마지막 경기 전날에 선수단장이 한국을 홍보하는 책자를 돌렸다는 이유로 체코 정부로부터 강제 추방을 당한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대회조직위원회는 한국의 사정을 배려했다. 한국과 유고슬라비아(한국이 78-71로 승리)의 최종전이 끝나고 한국의 준우승이 확정되자 체육관 내 회의실에서 조용히 트로피를 전달했다. 그리고 선수들은 샤워도 하지 못한 채 곧바로 체코를 떠나야 했다.
박신자 여사는 "(정식) 시상식도 하지 못하고 체코를 떠났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독일로 빠져나왔다. 48시간 안에 나가지 못하면 추방을 당하거나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했다"고 말했다.
박신자 여사는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뒤에야 자신이 대회 MVP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신자 여사는 "내가 농구의 피크(peak)까지 왔구나 라는 생각에 굉장히 좋았다"며 자신의 농구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그때를 꼽았다.
◇후배들에게 전하는 헝그리 정신
1960년대 여자농구는 곧 희망이었다. 세계 무대에 나서 승승장구하는 여자농구의 위상은 해방 전후 시대의 한국에 꿈을 심어줬다.
박신자 여사는 "지금처럼 스포츠가 많았던 시절이 아니고 즐길 수 있는 문화도 한정돼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길만한 게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박신자 여사와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동기 최윤자 여사는 "아마도 여자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많이 못 봤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며 "그때는 농구 시합만 하면 관중이 그렇게 찼다. 여태까지 농구 시합을 봐도 그때만큼 사람이 많은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환경은 열악했다. 최윤자 여사는 "그때는 공부를 하면서 운동을 했다. 방과 후에 연습을 했고 체육관도 따로 없어 흙바닥에서 했다. 우승을 해도 겨우 짜장면을 먹었고 농구화 하나로 1년을 뛰었다. 지금에 비해 대우는 못 받았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 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열심히 했다"고 회상한다.
여자농구는 많이 부유해졌다. 억대 연봉자들이 즐비하다. 환경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졌지만 위상은 그렇지 않다. 즐길 거리가 많아진 요즘 시대에 여자농구가 스포츠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레전드'는 끝 없는 노력을 당부했다.
박신자 여사는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다. 난 누구보다도 연습을 많이 했다. 왼손으로 훅슛을 쏘는 선수가 있으면 그걸 보고 따라했고 빠른 선수가 있으면 늘 그 선수와 경쟁해 스피드가 뒤처지지 않게끔 노력했다. 누군가 슛 300개를 쏘면 나는 301개를 쐈고 500개를 쏘면 나는 600개를 쐈다. 소질보다 중요한 것은 노력"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