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구(52) 전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의 선수시절 얘기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선수가 있다. 바로 라이벌 오하시 히데유키(50)다.
현 일본프로복싱협회(JPBA) 회장인 오하시는 장 전 챔피언의 11차(86년 12월), 15차(88년 6월) 방어전 상대였다. 당시 장 전 챔피언은 11차 방어전에서 5회 TKO승, 15차 방어전에서 8회 TKO승을 거뒀다. 특히 오하시에게 15차 방어전(일본 동경 고라꾸엔)은 치욕적이었다. 홈팬들의 응원 속에서 설욕을 별렀지만 7번이나 다운을 당하며 쓸쓸히 링을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지금, 링 위에서 피 튀기며 싸우던 장 전 챔피언과 오하시 회장은 '절친'이 됐다. "서로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면 만나서 술 한 잔 기울이고, 전화통화도 자주 합니다." 작년 9월 시합 참관차 일본에 갔을 때는 오하시 회장의 부모님과 인사를 나눴다. "오하시 부모님이 그러세요. '살아생전 장정구 씨를 직접 보다니 이런 영광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장 전 챔피언이 오하시 회장과 돈독한 사이가 된 계기가 있을까. "오하시가 일본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데, 제자들한테 자기가 7번 다운당한 경기 영상을 보여주는 거에요. 이 시합에 권투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면서. 저 같으면 안 보여줍니다. 오하시는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오하시 회장은 장 전 챔피언에 두 차례 패한 후 체급을 내렸고, 2년 후 마침내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다. 90년 2월 최점환을 9회 KO로 꺾고 WBC 스트로급 챔피언이 된데 이어 92년 10월 최희용을 누르고 WBA 미니멈급 챔피언벨트마저 거머쥐었다. 오하시 회장은 훗날 "장 전 챔피언에 두 번 패한 경험 덕분에 절치부심해서 세계챔피언에 오를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는 지난 2011년 프로복싱 한일 신인왕 대항전이 24년 만에 부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링 위에서 '적'이었던 두 사람은 이제 한일 복싱 발전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그리고 백발이 될 때까지 이들의 우정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