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 합의를 통해 양국관계 개선의 전기가 될 것 같던 세계유산 협상 결과가 오히려 불신감만 더욱 키우는 악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사토 구니 주유네스코 대사는 지난 5일 독일 본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영어 발표문을 통해 “1940년대에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동원돼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로 노역했다(forced to work)”고 밝혔다.
사토 대사의 발표문 가운데 해당 부분의 전문은 “More specifically, Japan is prepared to take measures that allow an understanding that there were a large number of Koreans and others who were brought against their will and forced to work under harsh conditions in the 1940s at some of the sites, and that, during World War II, the Government of Japan also implemented its policy of requisition”이다.
하지만 6일 일본 언론들에 따르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전날 밤(한국 시간) 세계유산위원회의 등재 결정 직후 사토 대사의 발언에 대해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해석을 달리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사토 대사의 해당 발언에 대해 강제성이 훨씬 약한 ‘일하게 됐다’는 정도의 표현으로 가번역해 언론에 배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대부분의 일본 언론들도 정부의 이런 번역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에 따라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의 한 맺힌 역사는 채 빛을 보기도 전에 다시 망각 속에 묻힐 운명에 놓였다.
일본 정부의 이런 ‘물타기 해석’은 메이지시대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언급한 강제징용의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한 꼼수로 해석된다.
일본은 일제하 한국인에 대한 강제징용 문제는 1965년의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됐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날 독일에서 벌인 한일 협상에선 국제여론과 시간의 압박 속에 일단 ‘(were) forced to work’이란 표현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내년에는 세계유산위원회 회원국 임기가 종료되는 일본으로선 의장국 독일이 주도적으로 나서 ‘합의 처리, 아니면 심의 연기’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차차선책이 불가피했다.
여기에다 메이지시대 산업발전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옛 영광을 되살리려는 아베 총리와 그 지지세력들에게 강제징용 인정은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가 아닐 수 없다.
아베 내각은 이런 대외적 발표와 내부적 불만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교묘한 언술로서 이런 ‘독특한’ 해석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라는 표현으로 본질을 왜곡한 바 있다.
더 큰 문제는 일본 정부가 이번 물타기 해석을 내부 비판을 일시 모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이 아니라 세계유산 협상 결과를 밑둥부터 흔들기 위한 포석으로 활용할 가능성이다.
이럴 경우 지난달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계기로 어렵게 싹 트기 시작한 양국간 신뢰는 다시 곤두박질치며 한일관계를 다시 악순환 고리에 빠뜨릴 수 있다.
우리 정부는 일단 즉각적인 대응은 피하고 있다.
외교부 내부적으로는 ‘against their will’이나 ‘forced to work’ 등의 영어 원문을 보면 누가 보더라도 ‘강제노역’으로 읽히는데 이를 부인하는 것이 기가 막힐 따름이라는 반응이다.
하지만 이번 합의는 영어로 이뤄진 만큼 일본 측 해석에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고, 자칫 일본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우를 범할 수 있다면서 경계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