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본에서 열리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당초 4일 밤(한국 시간) 등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었지만 한일 양측이 워낙 팽팽히 맞서는 바람에 심의를 하루 연기했다.
때문에 세계유산위원회에선 전례를 찾기 힘든 표 대결 상황까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원만한 합의 처리를 통해 마무리 지음으로써 한일관계 발전에도 나름대로 선순환적인 계기가 마련될지 주목된다.
이처럼 막판 합의가 성사된 배경은 크게 세 가지다.
근대산업시설 가운데 강제징용의 역사만 빼고 세계유산에 등재하겠다는 일본의 명분이 워낙 약했던데다 우리 외교당국의 노력 등으로 국제여론전에서도 밀렸고, 시간마저 일본 편이 아니었다.
일본은 메이지시대 산업시설 23곳을 등재하면서 1940년대 한국인 등의 강제징용이 이뤄진 7곳을 감안, 기간을 1850년~1910년으로 한정하는 꼼수를 부렸다.
이에 유네스코 산하 민간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각 시설의 전체 역사(full history)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라는 권고를 하면서 일본은 처음부터 스텝이 꼬였다.
해당 산업시설에서 강제징용이 이뤄진 역사가 너무 명백한 것으로 드러나자 일본의 막강한 외교력도 국제여론을 무작정 거스르기는 버거웠던 것이다.
미국 연방하원의원 6명이 세계유산위원회 의장에게 연명 서한을 보내 해당 시설의 세계유산 등재를 공개적으로 반대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우리 정부의 외교 노력도 초반과 달리 후반으로 가면서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세계유산위원회 21개 회원국 가운데 일본을 제외한 19개 국가로부터 사실상 표결 처리 반대 입장을 이끌어냈다.
만약 일본이 표결 처리를 강력히 요구했다 하더라도 한일양국 사이에서 부담을 느낀 다수 회원국들이 기권표를 행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다는 관측이 많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21일 도쿄에서 가진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일본 측의 양보를 담은 큰 틀의 합의를 이뤄내기도 했다.
특히 윤 장관은 그에 앞서 세계유산위원회 의장국인 독일의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외무장관과 만나 한일간 합의를 주선하게끔 마음을 움직인 것이 협상의 전환점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측은 이에 따라 의장국의 권한을 이용해 한일간 합의를 최대한 유도하되 여의치 않으면 표결 대신 심의를 연기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이 내년에는 세계유산위원회 회원국 지위가 사라진다는 것. 이에 따라 일본은 독일 등의 기류 변화를 감지하자 시간적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표 대결은 의장국과 다수 회원국이 반대하고, 내년으로 심의가 연기되면 승산은 더욱 희박해지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차차선책을 택한 것이란 분석이다.
23개의 해당 산업시설이 소재한 일본 지방자치단체들의 입장에선 강제징용 표기 여부보다는 어찌됐든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이 훨씬 큰 관심이었다는 점도 아베 내각을 압박한 측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