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석 달여간 대한민국을 뒤흔든 '성완종 리스트' 파문의 시작은 올해 3월 검찰의 경남기업에 대한 압수수색으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이명박 정부 시절 부실한 자원외교 수사를 전담하고 있던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임관혁 부장검사)는 지난 3월 18일 경남기업 본사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택 등에 대해 대대적인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첫번째 대국민 담화에서 '부패와의 전면전'을 선언한 지 6일 만에 이뤄진 압수수색이었다.
러시아 캄차카 반도 유전개발과 관련해 에너지 공기업들을 속여 성공불융자금을 지원받았다는 검찰 측의 논리에 대해서도 경남기업의 적극적인 해명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는 집요했다. 압수수색 이후 진척이 없던 것 같던 검찰수사는 4월 1일 성 전 회장의 부인을 전격 소환하면서 성완종 전 회장의 개인비리 사건으로 급선회했다.
검찰은 부인을 소환한 지 이틀 뒤에는 성 전 회장을 소환했고, 소환 후 이틀만에 횡령과 배임 혐의 등으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하기에 이른다.
성 전 회장은 영장실질심사를 하루 남겨 놓고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여론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기자회견 뒤 변호인과 만나 다음날 있을 법원의 영장실질심사 대책을 논의한 성 전 회장은 다음날 아침 자택을 빠져나가 종적을 감췄다.
◇ '성완종 리스트'의 등장과 검찰 수사 착수
9일 새벽 성 전 회장이 유서를 남긴 채 행방불명 되고 10시 30분으로 예정됐던 영장실질심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검찰에는 비상이 걸렸다.
성 전 회장의 휴대전화 추적을 통해 경찰이 북한산 일대에 대한 대규모 수색작업을 펼쳤지만 좀처럼 성 전 회장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이 사건은 검찰수사에 몰린 자수성가형 기업가의 극단적 선택 정도로 보는 게 언론들의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경향신문이 자살 직전 성 전 회장과 가진 전화 인터뷰 내용을 공개하면서 파문은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성 전 회장은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전·현직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 여권실세들에게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금품을 전달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김기춘, 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각각 10만달러와 7억원, 홍준표 경남지사에게 1억원, 이완구 전 총리에게는 재보궐 선거에서 3천만원을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캠프 시절 조직총괄본부장을 역임했던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에게 2억원을 현금으로 건넸다고 밝힌 뒤, 이 돈이 대선자금으로 쓰였을 것이라는 암시를 남겨 파문은 더욱 확산됐다.
경향신문 보도와 함께 검찰은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포함해 8명의 여권 실세 이름과 옆에 액수가 적힌 쪽지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성완종 리스트'가 공개된지 이틀 뒤인 4월 12일 대검찰청은 간부회의를 열고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의혹에 대한 수사 착수를 공식 선언한다.
검찰은 문무일 검사장(대전지방검찰청장)을 팀장으로, 구본선 대구서부지청장을 부팀장으로 한 특별수사팀을 조직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 특별수사팀 이완구·홍준표 정조준, 재보선 앞둔 정치권에 등장한 '사면 로비' 논란
특별수사팀은 꾸려졌지만, 수사팀 앞에 놓은 장애물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번 파문의 당사자인 성 전 회장을 조사할 수 없다는 현실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성완종 리스트'에 등장한 현 정권 최고 권력들을 뇌물죄나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기소하기 위해서 공여자의 진술 확보는 필수적이었지만 성 전 회장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성 전 회장의 행적과 돈 흐름을 재현해 내서 직접적인 진술보다 더 객관적으로 금품수수 사실을 증명해 내겠다는 전략이었다.
수사팀은 꾸려지자마자 성 전 회장의 최측근인 이용기 비서실장을 불러 성 전 회장의 동선복원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4월 15일 경남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통해 돈 흐름의 복원작업에도 착수했다.
하지만 수사팀의 기초작업에 시간이 길어지면서 언론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소문과 루머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17일에는 조선일보가 '성완종 리스트' 등장 인물 외에 여야 인사 14명이 적힌 장부를 검찰이 확보했다고 보도하자 문무일 팀장이 "수사팀을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며 격분하기도 했다.
이후 언론에 의해 꾸준히 의혹이 제기됐던 '성완종 비밀장부'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수사팀은 자료들을 폐기하다 적발된 경남기업 임직원들과 성 전 회장 측근들을 구속기소하는 등 수사의 속도를 올렸지만 정작 '성완종 리스트' 등장인물들에 대한 소환조사나 압수수색에는 신중한 모습을 보여 '봐주기 수사'가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였다.
수사팀의 신중한 행보 가운데 의혹 당사자들 측에서는 끊임없이 '말맞추기', '증거인멸' 정황들이 발견됐다.
수사팀의 최우선 목표로 지목된 이완구 전 총리와 홍준표 경남지사 측 사람들이 주요 증언자나 목격자들을 어르고 때로는 특정진술을 강요한다는 정황들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4.29 재보선을 앞두고 여당에서 시작된 '성완종 특별사면 의혹'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번져나갔다.
사실상 검찰에 대한 수사가이드라인이라는 비판 속에서 4.29 재보선이 치뤄졌고 결과는 여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 이완구·홍준표 소환 하지만 나머지 리스트 인물들은…
여권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정치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재보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두자 특별수사팀의 수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됐다.
수사팀은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돈을 건넬 당시 상황이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된 이완구 전 국무총리와 홍준표 경남지사를 소환했다.
수사팀은 성 전 회장의 진술 없이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두 사람에게 돈이 건네질 당시의 시점과 장소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 시점에서 '성완종 리스트' 수사의 행보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완구 전 총리의 경우 돈이 건네진 선거사무실에 출입하던 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있었고, 홍준표 지사도 성 전 회장으로부터 돈을 전달받아 건넨 경남기업 임원 윤모씨가 있었지만 다른 리스트 등장인물 6인들에게는 구체적인 정황도 증인도 전무한 실정이었다.
◇ 맥빠진 수사 막판, 사면 특혜 수사에 정권 눈치보기 비판도
두 사람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 짓고 잠시 소강상태였던 수사팀은 5월 17일 성 전 회장의 비자금 세탁소로 알려진 서산장학재단을 전격 압수수색하면서 리스트 인물 6인에 대한 수사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나머지 리스트 인물에 대한 수사는 사실상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언론에 수사팀이 이완구·홍준표에 대한 불구속 기소를 끝으로 수사결과를 발표할 것이라는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수사팀은 리스트에 등장하지 않은 인물들에 대한 수사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수사팀은 6월 24일 성 전 회장 측으로부터 거액의 금품을 받고 특별사면 명단에 포함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를 소환하면서 '박근혜 가이드라인'을 맞추기 위한 수사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또 성 전 회장으로부터 불법정치자금을 받았다며 김한길 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에 대해 검찰 출석을 통보했지만 두 사람 모두 소환에 불응하자 전격적으로 이날 수사결과를 발표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