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25일 오전 10시 45분, 미시마 유키오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쿄 시내 육상자위대 총감부에 난입했다. 그는 총감을 인질로 잡고 2층 발코니에서 1,000여 명의 자위대원들을 향해 일장 연설을 했다.
평화헌법을 뒤엎고 천황제로 돌아가자는 그의 절규에 대해 자위대원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건물 밖에서는 TV카메라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호응이 없는 것에 실망한 미시마는 "이제 자위대에 대한 꿈은 사라졌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뒤 총감실로 돌아갔다.
그는 웃통을 모두 벗은 상태에서 기합과 함께 단도로 자신의 배를 갈랐다. 이른바 '할복'이다. 그와 동시에 가이샤쿠닌(배를 가를 때 칼로 목을 쳐주는 인물)의 역할을 맡은 모리타 마사가쓰가 칼을 내리쳤다. 다섯 번을 내리쳐도 미시마의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모리타가 칼을 고가 하로야스에게 넘겼다. 그의 손에 한 칼에 목이 잘렸다. 모리타도 미시마의 뒤를 따라 자기 배를 갈랐다. 고가가 다시 한번 모리타의 목을 잘랐다. 이렇게 해서 해괴한 퍼포먼스가 막을 내렸다.
이런 참극이 왜 벌어졌을까?
미시마는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문학의 최고봉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사사를 받아 1949년 <가면의 고백>으로 등단했다. 이 소설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동성애자가 겪는 고통을 묘사한 자전적 작품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미시마는 이후에도 전후의 황폐함을 비극적인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린 <금각사>, 전후 세대의 허무주의를 탐미적 스타일로 표현한 <사랑의 목마름>, <금지된 색>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일본문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의 작품 중에 말을 더듬어 열등감에 사로잡힌 청년이 금각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결국 방화를 결심하기까지의 심리 흐름을 치밀하게 묘사한 <금각사>를 대표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1960년대 3차례나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오르내리던 미시마는 오에 겐자부로를 가리켜 "내가 상을 받은 다음에 노벨 문학상을 받을 사람은 오에 뿐이다"라고 내다봤다. 정작 본인은 갑작스런 자살로 수상하지 못했지만 오에가 199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니 예언의 절반은 맞은 셈이다.
그러나 미시마는 1960년 단편소설 '우국'(憂國)을 발표하면서 급작스럽게 극우 천황제 지지 작가로 변신한다. '나라를 걱정한다'는 의미의 제목이 보여주듯 작가의 극우 사상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줄거리를 살펴보자.
"주인공인 다케야마 신지 중위는 부인과 결혼해 신혼생활을 즐긴다. 얼마 후 자위대 청년 장교들이 천황의 직접 통치를 요구하는 2·26 궐기를 일으키는데 타케야마는 신혼이라는 이유로 궐기에서 빠진다. 다케야마의 동료들은 일부 각료를 사살했지만 끝내 쿠데타에 실패한다. 이들이 반역자로 몰리면서 다케야마는 자기 동료들을 사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결국 그는 부인과의 동반 할복 자살을 선택한다."
좌파 학생운동을 매스컴을 통해 마구 질타하고 틈만 나면 '일본도 국군을 창설하자'고 주장하고 다녔다. 나중에는 자위대에 체험입대를 해서 공수부대 훈련을 받거나 F-14 전투기를 타는 등의 기행을 벌였다.
한국에도 여러 차례 방문해 휴전선을 시찰하거나 무장간첩들의 침투 루트를 탐방했다. 1968년 북한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는 예비군의 공비 수색작전을 참관하기도 했다.
애국심과 군국주의에 빠져버린 미시마에게 일본의 전후 상황이 못마땅했다. 그는 행동에 옮길 조직 결성에 나섰다. 1968년 10월 사병대 '다테노카이'(방패회)를 만들었다. '천황의 방패'란 뜻이다.
강령으로는 반공과 천황제 지지, 폭력 불사를 내세웠다. 미시마가 직접 면접해서 입회가 허락된 100여 명의 회원들은 도쿄대, 와세다대, 게이오대 등 명문대학교 재학생이나 졸업생들이었다.
회원들은 시위대를 미행하거나 노동자로 가장해 간이 숙박소에 잠입해 정보를 수집했다. 1968년 10월 국제반전데모 모임 때는 학생시위대에 잠입해 리더를 색출하는 실전훈련까지 시켰다. 그러다 급기야는 극좌 학생들과의 공개토론에 나서게 된다.
이들 학생들은 일본의 자민당 정권 뿐아니라 공산당까지도 기득권 세력으로 비판하면서 '미·일 제국주의 타도'와 '제국대학 도쿄대 해체'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에 미시마 유키오가 홀로 들어가 단상에 섰다. 이른바 극좌와 극우의 '공개토론회'가 열린 것이다.
미시마는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나를 단상에 세우는 것이 반동적이라는 의견이 있었다구요? 뭐~ 반동이 반동적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기에 여기 섰습니다. (웃음)"
이런 미시마를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도 우호적이었다.
"저 근처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도쿄대 교수들보다 미시마씨가 선생이라고 부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에 대해 미시마는 공감을 표했다.
"제군들이 천황을 천황이라고 한마디만 해주면 나는 기꺼이 제군들과 손을 잡겠다"고 덕담을 건넸다.
2시간 30분에 걸친 토론회는 최고의 지성인답게 폭력과 윤리, 육체와 정신, 자아와 타자, 자연 대 인간, 시간의 지속성(크로노스)과 순간성(카이로스), 천황의 신격과 인격, 말과 사물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깊이있는 논쟁이 벌어졌다.
접점은 찾을 수 없었다. 미시마가 보기에 전공투는 "모든 과거를, 역사를, 전통을, 연속성을 부정하고 기억마저도 부정했다". 전공투가 보기에 미시마는 "과거에 대한 사모, 절대적 개념인 천황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평가했다.
그래도 토론이 우호적으로 진행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양쪽은 당시 일본의 기성체제에 대한 염증과 분노라는 출발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기존 체제를 타도하기 위해 어느 정도 폭력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도 통했다.
그러나 체제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세우려는 새로운 질서의 이름은 달랐다. 각각 '해방구'와 '천황제'를 내세웠다. 전공투는 자신들이 점거한 학교 강당에서 겪은 시·공간의 체험을 유토피아로 내세웠다. 반면 미시마에게 천황은 모든 것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양측은 토론 내내 서로의 유토피아를 들이밀었다.
(미시마)"당신들 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되잖아?"
(전공투)"그렇게 생각하면서 바리케이트 속으로 들어오면 되잖아?"
이런 대화를 주고받다가 한 학생이 미시마에게 정식으로 공동투쟁을 벌이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미시마는 이렇게 응수하며 토론을 마무리한다.
"나는 제군들의 열정을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안은 아주 묘한 꼬드김이라 아주 유혹적이지만 나는 공동투쟁을 거부합니다."
학생들은 웃음과 박수로 그를 환송한다. 이 흥미로운 토론회가 열린 지 1년 반 후인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는 자위대 건물에서 전통 무사식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해 충격을 준다.
전공투 학생들은 토론회 때 미시마가 의미심장하게 말한 얘기를 떠올렸다.
"내가 행동을 벌일 때는 결국 제군들과 똑같이 비합법적으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합법적으로... 결투의 사상으로 사람을 죽이면 살인범이니까 포돌이들한테 잡혀가기 전에 자결이든 뭐든지 해서 죽어버릴 겁니다."
미시마가 할복자살하자 뚜렷한 구심점이 없던 일본 극우세력의 정신적 지주로 부활한다. 그의 죽음은 전후 일본 사회 저변에 흐르는 군국주의를 일으켜 세워 아베 수상이 꿈꾸는 나라로 치닫게 된다.
같은 시기에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을 벌이던 김지하 시인은 <아주까리 신풍>이라는 시를 지어 미시마의 자살을 풍자했다.
아주까리 神風 - 三島由紀夫에게
별것 아니여 / 조선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 / 빼앗아 간 쇠그릇 녹여버린 일본도란 말이여 / 뭐가 대단해 너 몰랐더냐 / 비장처절하고 아암 처절하고말고 처절비장하고 / 처절한 神風도 별것 아니여 / 조선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 / 바람이지, 미쳐버린 / 네 죽음은 식민지에 / 주리고 병들어 묶인 채 외치며 불타는 식민지의 / 죽음들 위에 내리는 비여 / 역사의 죽음 부르는 / 옛 군가여 별것 아니여 / 벌거벗은 女軍이 벌거벗은 갈보들 틈에 우뚝 서 / 제멋대로 불러대는 미친 미친 군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