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史記(사기)' 淮陰侯(회음후) 열전에는 한신의 불우했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신이 평민으로 지낼 때 가난하고 행실도 좋은 편이 아니라서 추천해 주는 사람도 없이 빈둥거리며 淮水(회수)에서 낚시하고 있던 어느 날 한 아낙네가 한신의 굶주린 모습을 보다 못해 며칠간 밥을 주었다.
이를 본 동내 건달이 한신에게 겁쟁이라며 시비를 걸었다.
"용기가 있으면 나를 찌르고 그렇지 않으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라(信能死 刺我 不能死 出我袴下/ 신능사 자아 불능사 출아과하)"라고 시비를 걸자 물끄러미 불량배를 바라보던 한신은 머리를 숙이고 그의 가랑이 밑을 기어갔고 사람들은 모두 겁쟁이라 비웃었다.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수과지욕'이며 胯下之辱(과하지욕)이라고도 한다.
동네 건달의 사타구니 밑을 기어간 한신이 유방을 도와 한나라 최고의 창업공신이 됐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쓸데없이 작은 일로 시비를 벌이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이 됐다.
물론 한신은 제후가 된 이후 아낙네에게 천금으로 은혜를 갚았으며 一飯之恩(일반지은)은 여기서 생긴 말이다.
한신은 또 자신을 모욕한 이 무뢰배를 불러 中尉(중위)에 임명하며 "당시에 분을 참지 못하고 만일 그때 죽였으면 이름을 얻을 수 없었고, 참았기 때문에 오늘이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한신은 楚(초)나라의 項羽(항우)를 四面楚歌(사면초가)의 궁지까지 몰아넣었던 장군이고, 劉邦(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으로부터 兎死狗烹(토사구팽)을 당했다.
2200년 전의 역사적 인물인 한신과 그에게 따라붙는 '수과지욕'과 '토사구팽'이라는 고사성어가 떠올려지는 정치인이 있다면 단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될 것이다.
김 대표는 "여당 내에서 대통령과 싸우면 대통령이 질 수 없다는 것이 의원들의 생각"이라며 대통령을 이길 수 없다고 체념했다.
유승민 원내대표를 버리기로 결론을 내렸다. 힘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물러나지 않으면 당이 깨지는 상황까지 가는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로 유승민 원내대표를 버리는 것 말고는 퇴로가 없음을 내비쳤다.
김 대표는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론의 칼끝이 결국 자신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친박계 의원들은 유승민 보호를 외치는 김 대표를 겨냥해 '공동책임론'을 거론하는가 하면 김 대표를 제외한 다른 최고위원들의 사퇴를 통한 김무성 체제 와해론을 들먹이고 있다.
김무성 대표를 압박하고 있는 모양새다.
문제는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퇴하고 나면 친박과 청와대의 공세가 그걸로 끝나느냐는 것인데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한 정치 평론가는 "유승민 원내대표가 물러나면 청와대의 다음 타깃(목표)은 김무성 대표 체제 붕괴작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럴듯한 가정이자 정치적 상상력이다.
"우리 정치는 국민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만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을 한 번이라도 곱씹어 보면 박 대통령의 심중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당장은 아니지만 청와대가 내년 총선에 대비한 새로운 진용개편에 나설 계기를 찾을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다. 물론 친박계 의원들이 동원될 것이다.
비박계의 집단 반발이 잇따르겠지만 새누리당의 특성상 박 대통령이 몰아붙인다면 그렇게 갈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김무성 대표의 '가시밭길', '외줄 타기' 보행이 본격 시작됐다는 분석이 그래서 나온다.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는 일정 부분 이와 잇몸의 관계, '순망치한'이다.
유승민 대표의 퇴진 자리를 친박계 인사가 차지할 것이고 김 대표는 청와대에 종속되는 당·청관계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김무성 대표가 최근 들어 서청원 최고위원과 잦은 연락을 취하며 여러 가지 정치와 당무 현안을 상의하는 것도 청와대와 친박 소장파들의 압박작전을 이미 알아차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청원 최고위원 역시 김무성 대표 체제가 무너지면 정치적 입지의 불확실성을 마주하게 된다.
김무성 대표는 현재 한신처럼 '수과지욕' 문을 잘 통과하고 있다.
김 대표가 당과 청와대가 여러 쟁점을 놓고 갈등을 빚을 때마다 청와대 쪽에 기울였지, 당이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한 돌을 놓지 않았다고 자임한다.
청와대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김 대표는 "박 대통령의 뜻을 거스려선 안 되며 성공한 대통령이 되도록 보필해야 한다"는 말을 읊조리고 산다.
측근 가운데 일부는 때론 청와대와 맞서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지만 그때마다 김 대표는 그들을 나무라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측근은 "올해 초 김기춘 비서실장 시절 김 대표가 따돌림을 당할 때 청와대를 한 번 들이받으라는 건의를 했다가 혼줄을 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철저한 '수과지욕'의 처신이다. 물론 박 대통령의 입장에선 다른 평가를 할 수 있다.
그가 '수과지욕'의 관문을 돌파할지라도 '토사구팽'이라는 마지막 문을 넘어야 하는 큰 산이 그를 가로막고 있다.
정치적 파워를 키워 저항하며 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청와대의 뜻대로, 거수기 대표직을 수행할 수 있다. 그는 후자를 선택하려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