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24일)은 6.25전쟁이 일어난지 6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6.25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당하면서 한국교회 안에는 반공주의가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기독교 반공주의가 자리잡게 됐는지, 조혜진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기자]
개신교의 반공주의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실의에 빠진 청년들은 당시 유학생들을 통해 접한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꼈고, 기독교를 통해 민족해방을 꿈꾸던 청년 중 상당수가 사회주의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수립되면서 종교를 배척하는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앙숙관계가 됩니다.
특히, 1930년대 이후 종말론적 신학의 분위기는 공산주의를 말세에 기독교를 핍박하는 '붉은 용' '적그리스도'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6.25전쟁은 그 둘을 돌이킬 수 없는 사이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교회와 교인들은 공산당에 의해 큰 핍박을 받은데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의 기독교인들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남한교회의 반공의식은 더욱 투철해졌습니다.
[인터뷰] 이덕주 교수/감신대 역사신학
"생활근거를 빼앗겼죠, 종교적으로 탄압받죠, 이분들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북쪽에서 당했던 그 경험들..그것이 더 남쪽교회의 반공의식을 더 심화시켜버린 것이죠."
여기에 우리에게 기독교를 전해준 선교사들도 미국 등 서구 자본주의국가의 출신이다 보니, 동서 냉전시기의 한국교회는 '반공' 이외에는 선택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교계의 진보와 보수를 망라해 이어졌습니다.
1972년 정부의 ‘7.4남북공동성명’ 중 ‘사상, 이념을 초월한 민족 대단결 원칙’부분에 대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비판적 입장을 표명한 것만 봐도 한국교회 전체에 흐르던 반공정신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진보적 교회는 반공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게됩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북한 개신교 지도자들과 교류를 시작한 교회협의회는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에서 ‘증오에 대한 죄’를 공식적으로 고백했습니다.
[인터뷰]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 교회협의회 전 통일위원회 위원장
"1986년 최초의 남북 (교계 지도자) 만남의 모임을 가집니다. 이것이 사실은 남북관계의 장벽을 헐어내기 시작한 근원이라고 생각해요."
이때부터 반공주의는 보수기독교의 전유물이 됐고, 한기총 등을 중심으로 보수교계를 응집시키는 힘이자, 이른바 '기도회 정치'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탈냉전과 국내적으로는 민주화라는 분위기 속에 우리사회의 반공주의는 위력을 잃었지만 교육에 의해 세습된 교회 내 반공주의는 아직도 보수적 교회를 중심으로 흘러, 때론 민족 화해의 방해물로 작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CBS뉴스 조혜진입니다.
[영상취재/최현, 정선택] 영상편집/서원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