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의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는 지적과 함께 이참에 '백낙청 50년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아울러 표절 논란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신경숙 작가에도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 "창비 사과에 진정성 없다"
창비는 지난 17일 "신경숙의 '전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보도자료를 냈다가 거센 반발이 일자 18일 한발 물러나 "표절의 혐의를 충분히 제기할 만하다"며 사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문학계 내부와 독자들 사이에서는 '창비가 진정성 없이 사태를 서둘러 봉합하려고만 한다'는 비판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명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19일 CBS 노컷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창비의 사과는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식의 모호한 내용으로 사태를 봉합하려는 느낌이 든다"고 평가했다.
이어 "신경숙의 표절 그 자체를 명쾌하게 인정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면서 "창비는 이 문제를 신경숙과 상의할 것이 아니라 표절 여부에 대해 자체 판단해 조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길영 충남대 교수도 이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린 '창비와 백낙청 체제 50년'이라는 글을 통해 이번에 다시 나온 강일우 창비 대표의 사과에 대해 '실망스럽다'는 입장을 표했다.
그는 "창비 대표의 사과는 마치 이 정권이 그간 내놓은 숱한 사과들, 논점을 흐리는 애매한 사과문의 예를 다시 보는 느낌"이라면서 "진솔한 사과를 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정치권력과 문학권력은 그렇게 닮아가나 싶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창비는 홈페이지 자유게시판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창비의 사과가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한 독자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리셨네요. 신경숙을 두둔하다 독자들이 쓴소리하자 표절로 볼 수 있다는 회색지대적인 입장을 취하네요. 이건 책임지지 않으려는 비겁한 자세입니다. 실망입니다. 윤리를 회복하십시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창비의 역사는 백낙청이 지난 1966년 '창작과 비평'을 창간하면서 시작됐다. 이 때문에 창비에 대한 비판은 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인이자 창비를 대표하는 인물인 '백낙청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오길영 충남대 영문과 교수가 19일 CBS 노컷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긍정적 의미에서 창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백낙청 50년 체제를 깨야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인 오 교수는 "창비는 이제 '백낙청 체제' 50년의 빛과 어둠을 살필 필요가 있다. 그 핵심은 창비가 안팎으로 더 많은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며 이같이 주장했다.
오 교수의 이런 주장은 '신경숙 표절' 논란과 관련해 처음으로 '백낙청 책임론'을 공식 거론하는 것이어서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에 앞서 작가 고종석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창비는 한때 거룩했던 제 이름을 돈 몇 푼과 맞바꿨다. 이제 간판 내릴 때 됐다"고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창비 이콜 백낙청인 만큼, 창비의 타락은 백낙청의 타락이다"며 백낙청 선생을 직접 겨냥하기도 했다.
창비의 '신경숙 옹호' 논란과 관련해 이처럼 백낙청 선생에 대한 직간접적인 비판이 이어지고 있지만, 백낙청 선생은 아직 이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표절 혐의를 받으며 이번 논란에 중심에 선 신경숙 작가도 아직 추가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신경숙은 신작 집필을 위해 몇 달째 서울을 떠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표절 논란'이 불거진 이후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출판사와만 연락을 취하며 여론의 추이를 살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표절 논란과 관련해서 "독자분들께서 나를 믿어주시기 바랄 뿐이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자신의 표절 의혹이 이미 사회의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고 다수가 표절을 사실로 논의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처럼 계속 '침묵'으로 버티는 것은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더구나 현택수 전 고려대 교수이자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이 업무방해와 사기 혐의로 신경숙을 검찰에 고발한 상황이어서 기존의 '무대응 방침'이 더는 의미를 찾기도 힘들어졌다.
이와 관련해 이명원 경희대 교수는 "신경숙 작가가 스스로 성찰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문제가 된 작품집을 수거하거나 폐기하는 등의 적극적인 자세도 보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 "이번 기회에 반드시 도덕성 회복해야"
익명을 요구한 한 출판사 사장은 "이번 사태는 작가가 절필을 선언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라며 "또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지 않을까 걱정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한국 출판계에 '출판은 돈벌이 수단'이라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자기계발서 짜깁기'가 버젓이 행해지고, 저작권이 소멸한 외국 작품에 대한 '번역 표절'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한탄했다.
신경숙의 표절 논란을 계기로 한국 문단과 출판계가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명원 경희대 교수는 "우선 대형 출판사들과 한국작가회의 등 관련 단체들이 나서 합의가 가능한 수준에서 '출판윤리강령'과 '작가윤리강령' 등을 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대학 사회가 논문 표절에 대해 엄격하게 조사하고 징계하는 것처럼 문단에서도 해외사례를 참고해 한국적 상황에 맞는 제재 규정이나 원칙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