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제일의 산간오지로 이미 빨치산의 출몰이 잦았던 만큼 한국전쟁의 상흔을 비켜가지 못했다.
65년전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진격해 들어오는 북한군을 막을 정규 병력은 증산주재소(현 증산파출소) 경찰관 4-5명이 고작이었다.
경찰의 요청에 대한청년단을 조직한 마을 청년 100여 명이 파출소가 지급한 목총 하나 쥐고 사지에 뛰어들었다.
주민 전남석(80)씨는 “인민군이 마을외곽 세 곳에서 동시에 밀고 들어와 공격을 퍼부었다. 17살 이상 남자는 대부분 청년단에 가입해 전투에 참전하거나 경계 활동에 힘을 보탰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1950년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고 오상봉씨도 청년단원 특공대 수색대에 소속돼 활약했다.
경찰이 임시 순경으로 임용할 만큼 두각을 나타냈지만 결국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고 총살을 당했다.
이후 1961년 군사원호청(현 국가보훈처)이 설치됐지만 국가는 ‘참전 용사’ 오상봉을 외면했다.
전쟁 통에 면사무소와 파출소가 잿더미로 변해 호적등본까지 소실된 마당에 그의 참전을 증명해줄 만한 자료가 남아있을 리 없었다.
헌신과 희생마저도 함께 묻혀버린 지 45년 만에 그의 넋을 다시 불러낸 건 다름 아닌 증산면 주민들이다.
1995년 5월, 면민들은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전사한 마을 청년과 경찰관 22명의 이름을 새긴 충혼비를 건립했다.
증산파출소 최병태 소장은 “매년 현충일날 주민들은 충혼비 앞에서 추모식을 열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린다”며 "경찰은 올해 증산 충혼비를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해 줄 것을 국가보훈처에 요청했다”고 했다.
하지만 고인에게 걸맞은 예우를 해달라는 후손과 주민들의 요구는 번번이 좌절됐다.
2000년대 중반 출범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오씨의 참전을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아들 오천석(67)씨는 “진실화해위 결정을 토대로 보훈처에 국가유공자 유족 신청을 했지만 기각됐다”며 "행정심판원에 호소해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고 했다.
지난해 대구법원에 국가보훈처의 국가유공자비해당 결정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증산면 현지를 직접 찾아 현장검증까지 벌였다.
박형순 부장판사는 “충혼비를 살펴보고 전쟁을 전후한 오상봉씨의 행적에 대한 주민들의 증언을 들었다”며 “전투가 벌어졌다는 파출소와 면사무소 자리도 확인했는데 경계의 필요성은 충분히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주민 백필흠(84)씨는 "나도 당시 특공대에서 활동했는데 고인이 6.25를 전후해 공비 토벌과 경비 작전을 수행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며 "이제 이런 증언을 해줄 주민들이 마을에 몇 남지 않았다"고 했다.